오늘은 그림 대신에 조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조각들도 전시되고 있는데 수량이나 작품의 수준이 여느 박물관 못지않습니다. 가운데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한 중성적 이미지의 특이한 조각상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합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마프로디토스입니다.
헤르마프로디토스 기원전 3세기 ⓒ국립고고학 박물관, 이스탄불
그리스 신화는 흥미로운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이야기 속을 잘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사연들과 닮은 것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남편이 있었지만 바람을 피워 여러 아이를 낳습니다. 그녀의 상대 가운데 한 명이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 헤르메스입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바람둥이 남편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제우스와 관계한 여인과 그 사이의 아이들에게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곤 했는데, 헤르메스는 오히려 헤라의 귀여움을 받을 정도로 재간 덩어리였습니다. 날개가 달린 가죽신을 신고 이승과 저승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신 헤르메스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나 아들들이 에로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입니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2세기 로마 시대 복제품 ⓒ루브르 박물관, 파리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대개 로마시대의 복제품들을 통해서 원작이 어떠했는지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헤르메스와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합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 구경을 시작합니다. 이곳저곳을 유람하던 그는 어느 호수 앞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호수에 살던 님프 살마키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았습니다. 아프로디테의 아들인데 얼마나 잘 생겼을까요! 이때부터 살마키스의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향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화장하는 비너스 c.1647~1651 oil on canvas 122.5cm x 175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님프 살마키스의 사랑의 공세는 막 세상 구경을 나온 어린 소년에게 충격이었겠지요. 그는 그녀를 피해 호수에 몸을 담그지만, 살마키스는 물속까지 따라와 헤르미프로디토스를 포옹합니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 한 몸이 되고 싶었고 그녀의 소원처럼 두 사람은 한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특성이 모두 있는 몸이 된 것이지요. 기겁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이 호수에 뛰어드는 모든 인간을 자기처럼 남녀 한 몸이 되게 하고 호수물에 닿은 자들은 그들의 힘과 살을 잃게 해달라고 그의 부모에게 기도합니다.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 헤르마프로디토스와 님프 살마키스 1580~1582 oil on canvas 110cm x 81cm ⓒ빈 미술사 박물관, 빈
슈프랑거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며 옷을 벗고 있는 살마키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남녀 한 몸이 된,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신화는 오래도록 저주의 이야기였다. 남성과 여성 이분법으로 나뉜 세계에서 그 어느 것도 아닌 존재는 저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이들의 존재는 여러 인류 문명의 다른 신화들과 탈무드를 비롯한 여러 경전에 등장한다. 오래도록 저주로 여겨졌지만, 때론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남성은 무엇이고, 여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나눌 수 있고, 꼭 나눠야만 하는 것인지 등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