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IAA 모빌리티 2023(뮌헨 모터쇼)’에 마련된 CATL 부스 모습. ⓒ뉴시스, 신화통신
중국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전기차 시장까지 들어왔다. 한계로 지적된 주행거리도 개선되면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으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한국 배터리 업계는 주행거리가 긴 다원계 배터리의 장점을 고도화하는 가운데, LFP 배터리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기아는 전날 레이의 전기차 모델 레이EV를 출시했다.
현대차그룹에서 처음으로 LFP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다. 레이EV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FP 배터리는 NCM(니켈·코발트·망간) 등 다원계 배터리보다 에너지밀도가 낮아 1회 충전 주행거리가 짧지만, 가격 면에서는 유리하다. 니켈과 코발트 등 비싼 광물을 쓰지 않아 원가가 상대적으로 낮다.
레이EV의 최대 강점도 가격경쟁력으로 꼽힌다. 4인 승용 모델의 라이트 트림 2,775만원, 에어 트림 2,955만원이다. 647만원의 전기차 보조금을 적용하면 2천만원 초반대에 구입할 수 있다. 레이 내연기관 모델은 1,390만~1,815만원이다. 300만원을 보태면 전기차 모델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기아는 레이EV를 소개하면서 “가솔린 모델보다 더 나은 가속성능과 안정적인 주행성능을 확보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레이EV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각각 64.3kW, 147Nm다. 내연기관 모델 성능을 같은 단위로 환산하면 각각 55.9kW, 95.1Nm이다.
주행거리는 205km다. 시중에 판매되는 승용 전기차 모델 대부분은 400km 이상이다. 다만, 레이EV는 장거리 운행을 할 일이 많지 않은 경차라는 점에서 짧은 주행거리가 큰 흠이 아닐 수 있다. 초반 분위기는 좋다. 이날 기아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20일까지 20영업일 동안 레이EV의 사전계약이 6천대 이상 접수되면서 올해 판매 목표로 설정한 4천대를 50% 초과 달성했다고 밝혔다.
KG모빌리티도 LFP 탑재 전기차를 내놨다. 지난해 여름 출시돼 회사의 실적 개선을 견인한 토레스의 전기차 모델인 토레스EVX를 지난 20일 본격 출시했다.
가격은 4천만원 수준이다. 트림은 두 개인데 각각 4,750만원, 4,960만원이다. 보조금 834만원이 적용된다. 토레스 내연기관 모델은 3천만원 안팎이다.
경쟁 모델 중에서는 가성비가 높다. 중형 SUV 전기차 가운데 가장 싸다. 경쟁이 치열한 준중형 SUV 체급에서도 붙어볼 만한다. 현대차 아이오닉5 스탠다드 모델의 실구매가는 4천만원 초반으로, 토레스EVX와 비슷하다. 다만, 배터리 용량이 58.2kWh로 작다 보니 주행거리도 342km에 그친다. 용량 77.4kWh의 배터리가 탑재된 롱레인지 모델은 주행거리가 469km로 토레스를 앞서지만, 가격이 비싸다. 실구매가는 4천만원 중반~5천만원 초반대에서 형성된다. 폭스바겐의 ID.4는 주행거리 421km로, 5천만원 안팎에서 살 수 있다.
토레스EVX는 준수한 주행거리를 갖췄다. 1회 충전으로 433km를 달릴 수 있다. 배터리 용량이 73.4kWh로, 레이EV(35.2kWh)의 두 배가 넘는다.
토레스EVX의 배터리는 중국 BYD가 생산한다. 곽재선 KG모빌리티 회장은 전날 미래 발전 전략을 발표하면서, “화재 안전성, 가격, 주행거리 면에서 우리에겐 최적의 선택지였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계속 중국산 배터리만 쓴다고 단정 짓지는 않아야 한다. 아주 유연하게 열려 있다”며 “중국산 배터리를 일부 쓰고 있지만 수출을 통해 나라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국 전기차 시장에서 LFP 배터리 탑재 선두에 선 건 테슬라다. 지난 7월 출시한 모델Y 후륜구동(RWD) 모델에는 CATL의 LFT 배터리가 들어간다. 주행거리는 350km로, NCM 배터리가 적용된 롱레인지 모델(511km)보다 뒤처진다. 반면, 약 5천만원 실구매가는 롱레인지 모델보다 2,500만원가량 저렴하다.
KG모빌리티는 지난 21일 미래 발전전략을 발표했다. 사진은 행사에 참석한 곽재선 회장. ⓒKG모빌리티
주행거리 개선 성과 보인 중국, LFP 개발 나선 한국
중국산 LFP 배터리가 자국에서 벗어나 세력을 확장하는 모양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세계 주요 완성차 기업이 LFP 배터리 적용을 늘리고 있다. 포드는 올해와 내년 SUV 무스탕 마하E, 픽업트럭 F150에 LFP 배터리를 탑재한다. 폭스바겐은 최대주주로 있는 고션하이테크의 LFP 배터리를 도입하고, CATL로부터도 공급받을 예정이다. 고션하이테크는 창립자인 중국인 리젠이 2대 주주이며, 중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중국 판매 물량에만 LFP 배터리를 넣던 BMW와 벤츠도 유럽 시장에 LFP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를 내놓을 계획이다. 스텔란티스도 중저가 전기차에 LFP 배터리를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LFP 배터리가 확산하면서 중국의 배터리 시장 점유율이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 세계 배터리 시장 점율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중국 기업이 6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CATL은 출하량 기준 점유율 32.7%를 기록했다. BYD는 11.3%를 기록했다. LG에너지솔루션(16.5%)과 SK온(7%), 삼성SDI(5.1%)는 각각 2위, 4위, 5위였다. 한국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을 모두 더해도 CATL에 못 미친다. 테슬라를 고객사로 둔 파나소닉은 4.9%였다.
SNE리서치는 “중국 업체를 제외한 글로벌 기업이 단기간에 상위 10위권에 진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내다봤다. 특히 BYD에 대해서는 “배터리 자체 공급과 전기차 제조 등 수직 통합적 SCM을 통해 갖춘 가격경쟁력으로 3위에 올라 강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BYD는 중국 시장을 장악한 완성차 기업이기도 하다. 올해 1~7월 기준 중국을 제외한 시장에서는 순위권에 들지 못했지만, 중국을 포함한 집계에서는 점유율 21.1%로 테슬라(13.7%)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LFP와 다원계 배터리는 상호 우위 지점이 명확하다. LFP 배터리는 낮은 에너지밀도 탓에 주행거리를 늘리는 데 제약이 있다. 배터리가 무게 같으면 다원계 배터리의 주행거리가 더 길다. LFP 배터리의 무게를 늘릴 수는 있지만, 중량이 커지는 만큼 효율성은 떨어진다. 그간 업계에서 LFP 배터리는 시장 확대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이유다. 반면 LFP 배터리는 가격이 싸다. 값비싼 광물을 쓰지 않는다. 삼원계 배터리 핵심광물인 니켈과 코발트는 세계 매장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가격도 비싸다.
두 배터리 진영의 싸움은 LFP와 다원계 배터리가 각각 엔트리 시장, 프리미엄 시장을 양분한 가운데, 중간의 매스 시장을 두고 겨루는 구조였다. 관건은 LFP 주행거리 개선과 다원계의 가격경쟁력 확보 간 속도전이었다.
LFP 진영이 기술개발에 성과를 내면서 점유율을 확대하는 형국이다. 중국 배터리 기업은 LFP 배터리의 물리적 특성을 조립 공정으로 극복하고 있다. 배터리는 기본적으로 셀-모듈-팩 단위로 구성되는데, 모듈 단계를 건너뛰고 셀을 바로 팩으로 꾸리는 셀-투-팩(CTP) 기술이 도입되고 있다. 모듈 패키지가 차지하던 공간에 셀을 채워 넣어 에너지밀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실제 토레스 EXV의 LFP 배터리에는 CTP 기술이 적용됐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4~5년 전만해도 중국의 LFP 배터리 기술은 중국 내수 시장을 위한 저가 배터리에 머물렀지만, CATL·BYD·고션하이테크 등이 상용화하고 있는 LFP 배터리는 삼원계 대비 기술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도 지난 4월 보고서에서 “2020년 중국 LFP 배터리의 셀 단위 평균 에너지밀도가 145~160Wh/kg 수준이었으나, 최근 양산 능력 기준 LFP의 셀 단위 에너지밀도는 최대 210Wh/kg까지 향상됐고, 주행거리는 400km 수준으로 개선됐다”고 전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진 점도 완성차 기업이 값싼 LFP 배터리를 선호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전기차 시장 초기에는 소수의 소비자에게 고가의 모델을 팔았으나, 전기차 보급이 확산되는 현시점에서는 가격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한 연구원은 “향후 시장 성장을 위해서는 중저가 전기차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되고 있다”며 “잠재 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해지면서 전기차 가격 인하 추세가 지속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저가 전기차를 대량으로 판매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이익을 지키거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LFP 배터리의 채택을 늘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국 CATL 전기차 배터리 ⓒCATL
한국 배터리 3사는 다원계 배터리의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SK온은 코발트 프리 배터리 개발에 성공해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다원계 배터리 소재 중 가장 비싼 코발트 대신 니켈과 망간을 사용한다. 코발트가 빠지면서 발생하는 구조적 불안정성과 에너지밀도 저하 문제를 해결했다. SK온을 비롯해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도 성능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하이니켈 배터리 관련 기술도 고도화하고 있다. 니켈 함량이 높을수록 에너지밀도가 높아져 주행거리가 길어진다. 니켈 비중이 커지는 만큼 안정성에 관여하는 코발트와 망간의 비중이 줄어, 안정성 확보가 하이니켈 개발의 핵심이 된다.
LFP 배터리도 개발하고 있다. SK온은 지난 3월 인터배터리에서 LFP 배터리 시제품을 공개했다. 삼성SDI도 상하이에 R&D센터를 세우고 LFP 배터리를 개발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일단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에서 LFP 배터리를 생산하고, 이후에 전기차용 LFP 배터리를 만들 계획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가격경쟁력에서 우위인 LFP 배터리의 주행거리가 개선되면서 적용이 확대되고 있지만, 프리미엄 시장까지 들어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LFP와 다원계 배터리는 타겟으로 하는 시장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그간 다원계 위주였던 한국 배터리 기업도 포트폴리오 다양화 차원에서 중저가 모델향 LFP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