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못 키우는 사람이 있다. 물주고 햇볕만 쬐어주면 자라는 식물이 뭐 어려워 못키우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원에서 알려준 대로 일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물을 주고 혹시 몰라 영양제도 주었다. 좁은 화분보다 넓은 화분이 나을 것 같아 분갈이도 했지만, 식물은 죽고 말았다. 이유는 쓸데없이 물을 많이 주고 필요 없는 영양제까지 줘서였다.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식물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식물의 스트레스 저항성 유전자를 찾는 실험 과정을 리포트하듯 보여주는 이 작품은 불현듯 기르다 실패한 식물에 대한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식물의 저항성 유전자를 찾아낸다면 악조건의 상황에서도 생존하는 식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한 연구소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걱정을 가장한 편견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두산아트센터 DAC Artist(두산아트센터 아티스트) 강현주 극작 겸 연출의 신작이다. 강현주는 전작 ‘비엔나 소세지 야채볶음’, ‘시장극장’, ‘배를 엮다’ 등을 통해 사람과 공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섬세한 연출로 담아냈다. 이번 작품에서는 걱정을 가장한 편견에 대한 불편했던 기억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작품 구상의 계기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연출의 의도는 작품 속 인물 혜경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지게 된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두산아트센터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 들어온 한 청년이 호기심에 실험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갑자기 정전이 되고 놀란 청년은 그만 책상 위 실험 도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마침 실험실에 들어선 연구원 혜경은 실험도구를 맨손으로 주워 담고 있는 청년에게 모두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맨손으로 잡아서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방 소도시 국립대학 식물분자생물학 연구실이다. 식물학자의 부푼 꿈을 안고 인턴으로 들어온 인범, 연구실 초창기 멤버이자 응용생명과학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혜경, 논문 통과와 대기업 입사가 최대 목표인 예지는 응용생명과학부 석사 과정에 있다. 이 연구실의 책임자이자 응용생명과학부 교수인 은주와 출산하고 돌아온 포닥(박사 후 연구원) 지연, 혜경의 동기이지만 지금은 공무원이자 블로거인 도윤까지. 작품 속 인물들은 연구소라는 한 공간에 있지만 모두 다른 삶의 방식과 목표를 안고 살아간다.
생존에 필요한 것
생각해 보면 연구소 실험실이 배경이 되는 연극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연구소 실험실, 그것도 응용생명과학은 무척 낯선 배경이다. 하지만 ‘애기장대’ 식물을 이용한 실험 과정은 식물의 이야기에서 사람의 이야기로 관객을 이끈다. 실험이 실패하고 다시 시작되고, 사람이 떠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오고, 작은 오해와 적당한 타협.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들의 간극. 0.1mm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실험실은 어느새 작지만 요란한 소음을 내며 사는 삶의 현장이 된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두산아트센터
살아 온 곳을 기억하는 식물은 천적이 없는 곳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것, 식물도 서로 도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제대로 자랄 수 없도록 설계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애기장대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은 것일 수 있다는 것. 비과학적인 해석처럼 들리는 이 대사들이 과학만큼 명확한 진실로 다가온다.
혜경은 길거리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런 애들은 커서 뭐가 될까?’라고 했던 은주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혜경은 그런 애들도 커서 어른이 될 거라는 것, 그저 잘 지켜봐 주기만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건 식물이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대단한 저항성 유전자, 쾌적한 생존 조건보다 어쩌면 사랑받았다는 기억과 감각, 누군가 잘 지켜봐주고 있다는 믿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