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들의 무대가 막이 올랐다. ‘나는 가수다’도 아니고 ‘불후의 명곡’도 아니다. 대한민국 걸그룹의 원조 시스터즈들이 한 무대에 오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무대다. 관객들은 전설들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쇼뮤지컬 ‘시스터즈’(SheStars!)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9월 8일 금요일, 정식 공연의 막을 올린 이 작품은 포킥스 엔터테인먼트와 신시컴퍼니가 공동 제작을 했고 박칼린이 연출을 맡았다.
이 극의 주인공들은 ‘저고리시스터즈’ 이난영, ‘김시스터즈’의 김숙자, ‘코리안키튼즈’의 윤복희, ‘이시스터즈’의 김명자, ‘바니걸스’의 고재숙, ‘희자매’의 김인순이다. 화려한 쇼의 시작은 전설들의 자기 소개로 시작된다. 쇼뮤지컬답게 110분간 6명 전설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엮어 노래와, 춤, 이야기로 풀어낸다.
6명 전설들의 이야기가 쇼라는 형식을 입다
그 시작은 ‘목포의 눈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 이난영 선생이다. 대한민국 최초 걸그룹이라 할 수 있는 저고리 시스터즈는 1939년 식민지 치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오케(OKEH)레코드사 산하의 조선악극단 중 여성단원이었으며, 이난영은 이 단원들의 리더였다. 하지만 이들은 정식 앨범을 내지 않은 상태로 광복과 더불어 해체가 된다.
이난영은 한국전쟁 중 자신의 딸 김숙자, 김애자와 조카 이민자를 ‘김시스터즈’로 데뷔시킨다. 김시스터즈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최초 K-POP그룹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활동했던 김시스터즈는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한국인 아티스트가 된다.
1960년대의 상징이자 ‘울릉도 트위스트’로 유명한 이시스터즈, 1970년 신중현 작곡 ‘그 사람을 데려다주오’로 데뷔한 쌍둥이 자매 ‘바니걸스’, 국내 미니스커트의 열풍을 몰고 온 윤복희, 그리고 사회적 편견이 심했던 1960년대 희자매의 멤버로 등장해서 ‘거위의 꿈’ 등으로 사랑받고 있는 김인순, 인순이.
한국 걸그룹 파워의 시작점에 주목하다
한국 걸그룹 파워의 시작점에 주목했다는 박칼린 연출의 의도는 한국 여성 가수들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걸그룹의 선조 시스터즈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놓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그 시절의 기사, 영상 등 자료들을 무대 영상으로 활용한다.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 화면과, 쇼 무대에서 펼쳐지는 전설들의 노래와 춤은 한국 대중가요와 역사가 어떻게 궤를 같이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이자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시대에 등장한 저고리 시스터즈, 군사정권 당시 외래어 사용 금지로 인해 ‘토끼소녀’, ‘토끼자매’ 등으로 불려야 했던 바니걸스, 1971년 활동 당시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향해 지르는 손짓이 북한과 교신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며 간첩설로 고생을 하기도 했던 ‘거짓말이야’, '커피 한잔'의 김추자. 한국전쟁 이후 주둔하기 시작한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로 가난과 사회 편견과 싸워야 했던 김인순(인순이)까지.
쇼답게 역사는 배경이 되고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데 사용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관객들에게는 실존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노래와 가수가 낯선 관객들에게도 대중음악, 특히 오늘날 K-POP 걸그룹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그 시절 감성이 되살아나는 무대
출연 배우들이 멀티 배역으로 여러 역을 소화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출연배우는 모두 11명이지만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배우는 7명. 주연이었던 배우가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조연이 되고 단역도 된다. 각자 적게는 4인에서 많게는 7인의 역할을 역동적으로 오고 간다. 10인조 밴드가 만들어내는 전설들의 히트곡을 듣는 재미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지휘자 없이 밴드 마스터와 함께 구성된 10인조 밴드가 ‘처녀 합창’, ’울릉도 트위스트’, ‘What I’d Say’, ’커피 한잔’ 등 당대의 히트곡들을 연주해 그 시절 감성을 되살린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의 경성 조선극장, 미8군 무대, 60년대 라스베가스 호텔, 에드설리번 쇼, 서울 명동 거리 등 역사 속 다양한 배경이 등장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자료화면 속 가수들과 무대 위 가수들의 싱크로율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크다. 마치 그 시간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장면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일제 강점, 전쟁, 가난, 편견,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 등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 이들의 이야기는 고달픈 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낸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스터즈>는 110분간의 러닝타임을 끝내고 특별한 손님들과 만나는 '오프닝 나잇' 행사를 가진 바 있다. 이 작품 속 진짜 주인공인 이시스터즈의 김명자, 코리아키튼즈의 윤복희, 바니걸스의 고재숙과 출연 배우들이 관객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자양분이 된다. 과거의 전설들과 현재 주인공들의 만남은 그래서 의미있다. <시스터즈>는 쇼뮤지컬이어서 무겁지 않으면서도 감동과 재미를 준다. 이 작품은 오는 11월 12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