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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저울] 최소한의 선의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중에 ‘어벤저스’가 있다. 영화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최종 빌런(villain, 마블이나 DC 코믹스의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악당) 타노스에게 평정된다. 타노스는 범죄를 수없이 저지르는 자로서 우주의 생명체를 무참히 죽이며 재산, 성별, 인종, 친분과 상관없이 자기의 기준에 따라 사형을 집행한다. 반면, 한국영화 ‘범죄도시’에는 주인공 형사(배우 마동석)가 빌런들을 주먹 한 방으로 쓰러트린다. 빌런이든 주인공이든 ‘최종 보스’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에 관객이 몰리고 열광하는 듯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삶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사라질수록 내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상대를 경계하고 다투는 아수라의 세계에서 스스로 빌런이 되거나 빌런에게 당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닐까.

윤석열 정부가 시작되고부터 여러 전문가들이 경제, 사회, 외교, 국방 등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거나 퇴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유엔총회에서 40여개 국가 정상과 만나는 일이 기네스북에 오를 일인지 모르겠지만, 야당 대표와 집권 후 1년 5개월여가 되도록 회담은커녕 만남조차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기네스북감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이나 관료들마저 상대에 대한 어떤 인정과 존중도 없이 일관된 조롱과 폭언으로 상황을 뭉개고 있다. 유엔총회에서 자유와 가치 등 이데올로기적 말들을 풀어내지만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더욱더 사지로 내모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2022.05.26. ⓒ뉴시스

1920년 독일의 법률가 카를 빈딩(Karl Binding)과 정신과 의사 알프레드 호혜(Alfred Hoche)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das lebensunwertes Leben)의 파괴를 허용하기’라는 책자를 통해 뇌 손상이나 정신박약 같은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사망한 상태’이거나 ‘인간 존재의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개념은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를 형성하였고, 결국 홀로코스트에 이르게 하였다. 나치 독일에서는 살 가치가 없는 대상들을 ‘일탈자(deviant)’와 ‘사회혼란의 주범(source of social turmoil)’으로 분류하였고, 이들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을 주장했다. 일탈자들은 동성애자, 반체제자, 범죄자, 장애인, 정신질환자, 혼혈아 등을 말하고 사회 혼란의 주범들은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아나키스트, 민주주의자, 반파시스트, 여호와의 증인, 유대인, 집시, 기타 유색인종 등을 말한다. 1939년 ‘T4 작전(Aktion T4)’으로 어린이들이 독극물이나 아사(餓死)의 형태로 살해당했고 최소 8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불안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힘든 과거를 부정하려 애쓴다
그러나 불안의 근원은 결국 자신
지혜는 수용과 인정이라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160만 명 이상이 강제 징발로 노동력과 자본을 수탈당했으며 일본군 위안부로 20여 만 명이 차출되었다고 추정할 정도로 식민지의 암흑기를 거쳐야 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해왔던 3.1 만세운동과 의병과 독립군의 역사를 지우고 오히려 독립군을 학살한 자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나라에 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민생파괴 대통령 사과, 일본 핵 오염수 방류 반대, 전면적 국정쇄신 등을 요구로 20여 일을 단식하고 있는데 이것을 조롱하며 단식하는 사람 앞에서 먹방을 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성에 대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지운다고 지워질 역사가 아니며 조롱한다고 폄하될 일이 아닌 것처럼, 이에 대한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이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로 남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매일 불안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힘든 과거를 미화하고 부정하려고 한다. 강한 신념과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더라도 불안은 자신의 내면에서 생기는 것이기에 스스로 그 불안에 매여 사는 것이다. 권력과 인맥, 돈과 스펙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불안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그 불안의 근원이 자신이기에 이런 전략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빛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서는 어둠에서 볼 수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별을 본다는 것은 지혜를 발견하는 눈을 갖는다는 일이다. 빛만 강요하는 부정과 말살 같은 강압적 방식으로는 지혜를 발견할 수 없다. 지혜는 수용과 인정이라는 방식을 통해 다가오기 때문이다.

법은 최소한의 선의라는 말이 있다. 법은 윤리를 기초로 하기에 상식의 수준에서 법을 다뤄야 하며 법기술자들의 요란한 말기술과 협잡과 뒤통수치기로 옭아매서는 더더욱 아니 될 일이다. 야당 대표를 향한 수백 번의 압수수색과 먼지털이식 수사, 일방적인 여론호도에도 흠집만 낼 뿐 증거를 내밀지 못하는 검찰국가에서 그래도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선의를 확인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질서가 될 때 편파적 정의를 내세우는 ‘빌런’ 대신 상식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보통 사람들이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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