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정민갑의 수요뮤직] 30년을 이어온 노래의 힘과 질문들

통일의 노래 희망새 30주년 기념 콘서트 ‘벽을 허물고 날아라’

희망새 30주년 기념 공연 장면 ⓒ윤성광

대학시절 학생운동의 일원이었을 때 자주 부른 노래는 대부분 민중가요 노래패 꽃다지와 서총련노래단 조국과청춘의 곡이었다. 거리에서 싸울 때는 '결전의 날', '복수가', '출정전야' 같은 노래를 합창했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 때는 '바위처럼',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청년진군가'를 부르며 율동을 했으며, 뒷풀이에서는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 같은 노래에 젖어들었다.

1980년대 학번 선배들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나 창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민중가요를 좋아했지만, 1990년대에는 새로운 민중가요가 넘쳐났다. 서총련노래단 조국과 청춘, 경기남부총련 노래단 천리마 같은 학생운동 단위의 노래패가 있었고, 학교의 민중가요 동아리에서도 창작곡을 곧잘 만들어냈다. 노래마을, 소리타래를 비롯한 전문 노래패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희망새가 있었다. 통일의 노래 희망새는 1993년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수도권 노래패가 아니었고, 1980년대부터 활동하던 노래패가 아니었다. 특히 희망새의 무대의상과 창법은 전무후무했다. 희망새는 하늘하늘 거리는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북한에서 가져온 것 같은 노래를 불러댔다. 희망새의 ‘희망새’는 TV뉴스채널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북한 노래처럼 곱고 간드러졌다. 반면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는 북한 혁명가극에서 부를 것만 같아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희망새 1990년대 공연모습 ⓒ희망새

그런데 그 노래가 당시 90년대 초반 학번들을 사로잡았다. NL들에게만 통했을 수 있지만, 노래방에 가면 강수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고르는 X세대 운동권들이 희망새에 빠져들었고 희망새에 열광했다. 희망새를 처음 본 건 언제였을까. 1993년 한총련 출범식이나 그 해 범민족대회 같은 큰 집회 때부터였을 텐데,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고음에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그 뒤로는 희망새가 나온다 하면 긴 집회에 지쳐 졸고 있던 이들이 모조리 일어나 환호했다.

하지만 희망새의 날들은 빛나지만 않았다.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차에 걸쳐 전단원이 구속되었고, 1998년에는 범민족대회 공연 참가로 다시 대표와 단원이 구속되었다. 그럼에도 희망새는 꺾이지 않았다. 희망새는 2002년까지 다섯 장의 음반을 발표한데 이어, 2006년부터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활동을 이어갔다. 노래극단의 정체성을 가진 희망새는 지금도 연극과 뮤지컬로 평등과 통일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 사이 30년이 지나갔다. 희망새에서 청춘을 바친 이들은 어느새 장년이 되었다. 희망새의 노래를 듣고 불렀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9월 16일 토요일 저녁 7시 서울 영등포아트홀에서 열린 통일의 노래 희망새의 30주년 기념 콘서트 ‘벽을 허물고 날아라’는 오랜만에 희망새의 옛 노래와 옛 단원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대 위에는 연주자를 포함해 20여명의 출연진이 대거 올라왔다.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통일선봉대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조국 위한 삶이 아름답지 않은가’ 같은 희망새의 대표곡들이 대규모 합창으로 힘차게 울려 퍼졌다. 민중가요 노래패가 줄어든 시대, 노래패의 규모마저 소규모가 된 시대에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대형 합창의 향연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듣는 노래를 울컥거리며 다 따라 부르고 있었다.

희망새 30주년 기념 공연 장면 ⓒ윤성광

민중가요를 잘 모르는 이들은 민중가요가 다 똑같을 거라 여기지만, 그럴 리 없다. 지금은 희망새의 초창기 노래 같은 합창곡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운동이, 특히 통일운동이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운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운동가에게 절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헌신을 요구하지 않기도 한다. 희망새의 음반이 계속 나오고 그들의 노래가 운동사회에서 퍼져나갈 때는 한총련이라는 대오가 통일운동을 채우고 있었다. 범민련의 존재 또한 빠트릴 수 없다. 그때는 평생 운동을 하고 혁명을 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당당하게 선언하고 낙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통일운동을 단단하게 뒷받침하고 이끄는 조직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통일에 대한 관심도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희망새의 30주년 기념 콘서트는 30년동안 한결같이 노래해온 민중음악인들의 뚝심과 저력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그새 달라져버린 현실을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30년전 수 만 명 앞에서 노래하던 희망새 앞에는 영등포아트홀조차 다 채우지 못한 관객들이 있었다. 관객 가운데 젊은 학생의 수는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희망새의 히트곡들 역시 지금의 노래가 아니라 30여년 전의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공연은 희망새 단원이었던 배우 고창석과의 토크, 청소년무용단 버선코와 박종화의 축하공연 등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지만, 마냥 즐겁게 보기는 어려웠다. 그 때 집회장에서 희망새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조국통일을 외쳤던 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왜 그들 중 극히 일부만 이 공연을 찾았을지 이유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희망새의 노래는 여전히 멋지고 당당했지만, 희망새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노래를 들으며 다시 그 때의 기백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이 노래들이 더 이상 지금의 노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분명해졌다.

희망새 ‘北콘서트’ 공연모습 ⓒ희망새


그렇다고 희망새의 30주년 기념콘서트가 단지 추억과 그리움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도 희망새의 노래를 그렇게 소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함께 선언하는 노래보다 홀로 사유하는 노래, 길게 비판하는 글보다 웃으며 받아치는 짤이 더 많은 공감을 발휘하는 시대에 희망새의 공연은 때때로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지금의 노래들이 감히 보여주지 못하는 신념과 기세를 터트린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공연의 말미에서 ‘아침은 빛나라’를 부를 때는 마음속에 횃불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어떤 노래가 더 낫다고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희망새의 30년에 걸친 수고와 역할을 되새겨보고 어떤 마음을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을 공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겨준 공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면서 하염없는 질문으로 이끌었다. 어떤 노래는 특정 세대와 함께 타올랐다가 소멸하는 것일까. 운동의 힘을 얻지 못하는 민중가요는 좀처럼 퍼져나갈 수 없는 것일까. 지금 평화와 통일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고 불러야 할까. 다시 평화와 통일의 노래를 수많은 이들이 함께 부르는 날이 찾아올 수 있을까. 오래도록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관습일까 뚝심일까. 노래가 끝난 뒤 노래처럼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을 잔뜩 안겨주는 걸 보면 역시 희망새의 노래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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