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2일 라이브클럽데이를 보러 서울 홍익대학교 앞 공연장 벨로주(Veloso)를 찾았다가 조금 놀랐다. 이날 벨로주의 라이브클럽데이 공연은 로우행잉프루츠, 지소쿠리클럽, 해서웨이로 이어지는 세 밴드의 릴레이였는데, 스탠딩 공연 관객이 그득했다. 족히 100명 이상 되어보였다. 솔직히 이 정도로 관객이 몰릴 줄 몰랐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들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관객 100명을 모으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콘서트를 많이 보지 않았다면 그깟 100명이라며 코웃음 치겠지만, 콘서트에 100명이 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다는 의미이다. 최소한 3년 이상 여러 클럽들을 돌면서 계속 멋진 공연을 펼치지 않았다면 만들지 못했을 결과이다. 음악팬들은 안다. 서울의 주요 공연장 규모마다 계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계단을 올라가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라이브클럽데이 무대에 오르기만 해도 꽤 성공한 것임을. 이 정도면 페스티벌 무대에도 설 수 있다.
여느 공연이 그러하듯 이날도 20대 여성 관객이 대부분이었고, 젊은 남성 관객이 일부 섞여있었다. 세 밴드가 이어서 공연을 할 때마다 관객이 들고 나긴 했다. 그래도 마지막 팀인 해서웨이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젊은 관객들은 줄기차게 영상과 사진을 찍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20여 년 전 클럽 쌤, 빵, 타 같은 곳을 기웃거리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 무대 아래에서 듣고 따라 불렀던 시와,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오지은, 이장혁, 플라스틱 피플, 허클베리 핀, 할로우 잰 같은 이들의 노래는 깊은 밤 꿈까지 따라오곤 했다. 클럽들의 조명과 공기, 습도와 냄새까지 다 기억날 정도다. 그날 벨로주에서 세 밴드의 공연을 지켜본 이들은 오래 전 내가 그랬듯 음악으로 청춘의 날들을 감싸는 중이었다.
그런데 무대 위에 선 이들이 달라졌다. 시와, 이장혁, 허클베리 핀은 여전히 활동하지만 그 시절 즐겨들었던 델리 스파이스, 스웨터, 언니네이발관 같은 팀의 라이브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공연장들이 사라졌고, 어떤 뮤지션은 노래를 멈췄다. 하지만 빈자리는 래퍼나 알앤비 뮤지션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케이팝과 힙합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검정치마, 국카스텐, 브로콜리 너마저, 장기하와 얼굴들, 혁오는 밴드 음악의 가치와 즐거움을 꿋꿋이 지켜냈다.
그리고 이제는 실리카겔과 아도이가 맨 앞에 서 있다. 지난해부터 다시 열린 페스티벌에 가보면 안다. 그새 한국 밴드신의 대표가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올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과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서 실리카겔이 뿜어낸 에너지는 가히 두 페스티벌 역사에서 최절정의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대중적으로는 잔나비의 인기가 두드러지고, 새소년은 인기를 해외로 확장하고 있으며, 이승윤은 방송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관록의 자우림만 외롭게 밴드 음악의 인기를 지키는 상황이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도권 안팎에서 젊고 새로운 밴드들이 계속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김뜻돌, 검은잎들, 공중그늘, 너드 커넥션, 다브다, 더 보울스,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라쿠나, 로우 행잉 프루츠, 모스크바서핑클럽, 보수동 쿨러, 불고기 디스코, 브로큰티스, 설, 세이수미, 소음발광, 신인류, 아디오스 오디오, 웨이브 투 어스, 지소쿠리클럽, 차세대, 코토바, 튜즈데이 비치 클럽, 해서웨이 같은 팀을 이야기 하지 않고 지금의 대중음악을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다. 그새 경력이 쌓인 검정치마, 글렌체크, 까데호, 로맨틱펀치, 쏜애플, 이디오테잎, 잠비나이, CHS는 여전히 뜨겁다. 관록의 갤럭시 익스프레스, 노브레인, 데이 브레이크, 크라잉넛, 허클베리 핀이 바위처럼 버티는 동안 벌어진 변화다. 그리웠던 마이 앤트 메리가 돌아왔고, 경력자들이 헤쳐모인 봉제인간, 스네이크 치킨 스프까지 등장했다. 2023년의 한국 록 밴드 신의 지형은 대략 이와 같다. 이 정도는 들어야 밴드음악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두각을 보이는 밴드들은 인기를 이어온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창작력과 연주력을 겸비했다. 대체로 팝에 가까운 감각적인 멜로디를 뽑아낼 뿐 아니라 라이브에서는 매끈하고 능숙한 연주력을 선보인다. 다들 윗세대 밴드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검정치마, 넬, 혁오의 영향력을 발견할 때가 많다는 것인데, 그만큼 세 밴드가 대중적인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어 한 시대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록 마니아를 사로잡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밴드의 음악에 다른 장르의 어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20년 전 델리 스파이스, 마이 앤트 메리, 언니네 이발관 같은 밴드를 사랑했던 이들은 지금 실리카겔, 아도이를 비롯한 2023년의 밴드 음악을 챙겨듣고 있을까. 혹시 김광석을 사랑하는 4, 50대들처럼 김사월, 김목인, 정밀아, 황푸하는 듣지 않으면서 “역시 옛날 노래가 최고”라고 유튜브 댓글을 달고 있지는 않을까. 실리카겔과 아도이가 두각을 보이고 있다지만, 세상에는 실리카겔과 아도이를 모르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지금 활동하는 록 밴드는 부활, YB 정도만 아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온라인 플랫폼의 영향력이 막강하다해도 TV를 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인기가 분명히 있다. 세대와 관심마다 흩어진 세상은 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벽은 의외로 굳건하다. 많은 이들은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가니, 대중적인 뮤지션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둘이 아니다. 2023년 한국 밴드 음악의 역사를 맨 앞에서 써나가고 있는 뮤지션들 중에 누가 이 벽을 허물 수 있을까. 누가 20년 뒤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까. 삶은 흐르고 세상은 변해도 음악은 계속된다. 좋은 음악을 찾아 듣는 즐거움만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