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정일 칼럼] 남로당은 대한민국의 역사다

편집자주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장정일 작가의 칼럼을 새로 연재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가 육사 본관(충무관) 앞에 설치된 항일독립운동가 5인(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의 흉상을 모두 치우려고 한다는 뉴스가 나온 것은 8월 25일 전후다. 철거 논쟁이 불거지기 전인 7월 2일, 국가보훈부 초대 장관 박민식은 ‘친북 독립운동을 재심사’하겠다고 밝혔고,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불붙은 8월 31일, 국무총리 한덕수는 국회 연설에서 해군의 최신 잠수함인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했다. 일제에 저항한 무장투쟁의 역사를 지우고 냉전시대의 절대 가치였던 반공으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결정에 ‘일베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번 정권의 총지휘자 윤석열이 있다. 그는 올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서, 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가 ‘역사 쿠데타’의 장본인이다.

2018년 3월 1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흉상 제막식에서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등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김완태 육군사관학교장을 비롯한 군 관계자, 사관생도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흉상은 왼쪽부터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2018.3.1. ⓒ뉴스1

흉상 철거 논란과 거의 같은 시기인 8월 23일 처음 보도되었으나, 쟁점이 되지 못한 화제가 있다. 시인 김수영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원이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이제껏 김수영의 남로당 가입 여부는 소문만 떠돌았고, 김수영 시인과 가장 깊은 얘기를 나누었을 부인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이 좌익 계열의 문학가동맹(문맹)의 맹원이었을 가능성조차 부정했다. 따라서 시인의 의용군 자원입대도 공산군에 의한 강제 징집으로 자동 해석되었다. 하지만 조은정 현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2018년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도중에 ‘서울신문’ 1949년 11월 19일자 2면 광고란에 실린 김수영의 남로당 탈당성명서를 발굴했다.

시인의 탈당성명서 전문을 보자. “본인은 해방 후 남로당과 문맹에 가입하였으나 본의 아님을 깨닫고 탈당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자에 성명함. 4282년(1949년) 11월18일 충무로 4가 36의 17호 김수영.” 이로써 김수영이 남로당 당원이자 문맹의 맹원이었음이 판명되었고, 의용군 자원입대를 부인해온 김현경 여사의 증언도 거짓말일 확률이 높아졌다. 최하림은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2001)에서 그가 의용군에 자원했던 상황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완곡하게 기술했다. 김현경 여사는 ‘피랍’이라고 써주지 않은 것에 위험을 느꼈거나 불쾌했는지 “엉터리고 어디서 들은 얘긴지 알 수 없다”(『먼 곳에서부터』,푸른사상,2022,144쪽)라고 거칠게 반응했다.

보수 언론과 우파 논객들은 이 메가톤급 쟁점을 모른 체 한다. 지금까지 우파 논객들은 해방 정국 초기에 좌파의 문맹에 대항하여 우파 문인들이 결성한 문학가협회(문협) 진영의 시인들, 예컨대 서정주 같은 시인이 밀려나고 김수영이 한국 현대시의 좌장에 오르게 된 배경에 좌파 문학인과 지식인의 공조가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실제로 저 사실이 한국전쟁 직후에 널리 알려졌다면, 아무리 전향을 했다하더라도 김수영은 1987년에서야 해금된 월북 작가들처럼 출판과 연구가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족쇄를 차고서는 문협 정통파 시인들을 누를 수 없었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지우려는 대한민국 우파는
왜 남로당 전향자들의 ‘기여’는 외면하나


저 뉴스가 메가톤급 폭탄이라는 것은 문학계의 사정만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김수영이 그랬듯이, 박정희도 남로당원이었다.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밝힌 조갑제는 『이용문 - 젊은 거인의 초상』(조갑제닷컴,2016)에서 이 사실을 복기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다던 이용문 장군에 대한 이 평전에서, 조갑제는 많은 일군 출신 장교들이 창군(創軍) 초기에 좌익으로 넘어갔던 이유를 “친일 경력자들의 심리적 불안 때문”으로 분석한다. “미 군정시절 친일 경력자들은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 자신들이 어떤 처우를 받을지 불안에 떨었다. 특히 좌익계열이 친일파의 단죄를 소리 높이 외쳤다.”(이상 119쪽) 친일 경력을 가진 장교들은 자구책으로 남로당에 가입했다. 더구나 친일 경력자인 박정희에게는 좌파 활동가였던 형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월 폭동 때 경찰에 피살당했다는 원한도 남로당에 가입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남로당 조직표 상의 상층부에 있었던 박정희가 전향하게 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지역에서 있었던 군사 반란 직후, 숙군(肅軍) 작업에 걸려든 때문이다. 1948년 11월 11일,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조직명단과 생명을 맞바꾸었다.”(125쪽) 무기형을 선고받은 박정희는 조선인 일군 중에서도 악질로 분류되는 백선엽과 김창룡의 연대 보증으로 1948년 12월 중순쯤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숙군의 중심은 육군정보국이었고 실무 책임자는 백선엽 휘하의 제 1연대(육본의 직할부대) 정보주임 김창룡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1971년 당시 열린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를 식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제공 : 뉴시스


박헌영의 남로당(1946년 9월 3일 창당)과 북로당으로 약칭되는 김일성의 북조선노동당(1946년 8월 29일 창당)은 별개의 당이었다.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이 박헌영의 노력으로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재)창당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분당한 것이 북로당이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남로당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축소했다. 두 당은 새 국가 건설 전략은 물론 인적 구성이 완전히 달랐다(서로의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땅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3주일 후인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한 땅에 들어섰다. 남로당이 남한에서 불법화하면서 박헌영은 무력 투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남로당의 활동 공간은 더욱 좁아졌고, 끝내는 그 자신도 북으로 피신했다. 자기 기반을 잃은 남로당은 1949년 5월 15일 북로당에 의해 해체되었고, 남로당을 흡수한 김일성은 같은 해 6월 30일 조선노동당을 창당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기틀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고, 김수영은 문화와 예술에서의 진보와 선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해준다. 남로당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전향한 남로당 잔당이 대한민국의 살(물질)과 혼(문화)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우파는 현대사를 반쪽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선은 망해도 좋은 나라라며 조선을 완전히 부정한다.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것은 일제였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런 ‘뉴또라이’들이 준동할 것을 미리 알고 「거대한 뿌리」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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