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때맞춰 주류 언론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하 고준위특별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독려하는 모양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감에서 이 문제를 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준위특별법이 제정되면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연막을 피우고 있다.
다행히 주류 언론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도 고준위특별법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고준위특별법(안)이 3건 발의된 가운데 여야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국감 이후 총선 체제로 돌입하면 합의 처리가 난망하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주류 언론의 우려가 현실이 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핵발전소는 보통 30년 가동한다. 길게 끌어도 50년 남짓이다. 가동을 마친 핵발전소는 해체되지만, 핵폐기물은 그대로 있다. 방사선이 낮은 ‘중저준위’ 핵폐기물은 최소 300년 이상, 방사선이 매우 높은 ‘고준위’ 핵폐기물은 100,000년(십만년) 이상 인간 생활권에서 완전히 격리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시설이 영구처분장이다. 중저준위 영구처분장은 우리나라도 경주의 월성원전 인근에 건설해서 운영하고 있지만, 고준위 영구처분장은 언감생심이다.
고준위 영구처분장의 경우 우리보다 핵발전 역사가 수십 년 앞섰다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도 엄두를 못 내는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준위특별법을 제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성급한 입법화는 더 큰 화를 부르게 된다.
고준위특별법 제정돼도 고준위핵폐기물 해결 안 된다
심지어 여당 의원들이 발의한 고준위특별법(안)에는 2050년 영구처분장 확보가 명시되어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처음 확정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확인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에 따르더라도 2024년부터 부지런하게 서둘러도 영구처분장은 2061년 확보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10년이나 더 앞당겨 2050년 확보를 법률에 못 박자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의문스럽다.
고준위특별법 촉구는 ‘현세대 책임론’에 크게 기대고 있다. 녹색원자력학생연대는 지난달 20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원전을 통해 찬란한 경제성장과 저렴한 전기요금의 혜택을 누린 세대가 뒤처리는 저희에게 넘기려는 건가요? 언제까지 이 상황을 방치할 겁니까?”라며 고준위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미래세대에 염치없고 미안하지만 ‘현세대 책임론’을 이제 폐기하자. 섣부른 고준위 영구처분장 건설은 미래세대에 더 큰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 생생한 사례가 독일 니더작센주의 아세(Asse) 영구처분장이다. 1967년부터 1978년까지 11년간 중저준위 핵폐기물을 반입하고 폐쇄한 아세 영구처분장은, 뒤늦게 지반 균열과 지하수 유입으로 방사능 누출 사고를 일으켰다. 이에 독일 정부는 아세 영구처분장의 핵폐기물을 콘라드(Konrad) 영구처분장으로 이송 결정했고, 우리 돈으로 6조 원 넘게 투입됐다.
현세대가 보유한 기술적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히 해야 한다. 영구처분장 확보를 2100년 이후로 미루고, 중간저장을 100년 동안 안정적으로 하는 정책이 현실적이다. 정부와 핵산업계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필요하다.
‘현세대 책임’ 대신 ‘고통 분담’, ‘공동 책임’ 원칙으로
‘현세대 책임’ 원칙을 뺀 자리에 ‘고통 분담’ 또는 ‘공동 책임’ 원칙을 넣어야 한다. 100년 동안 안전하게 고준위 핵폐기물을 보관할 중간저장시설은 서울 또는 수도권에 건설해야 한다. 더 이상 핵발전소 주민들에게 고준위 폐기물을 떠맡기면 곤란하다. 2031년이면 부산의 고리원전부터 임시저장시설이 포화되어 더 이상 고준위 핵폐기물을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지금 시급한 것은 고준위특별법 제정이 아니라 중간저장시설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다.
핵산업계의 일설에 따르면 관악산 일대가 지질적으로 핵폐기물 보관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관악산 주변을 유력 예정 부지로 하고, 수도권에 가능한 후보 부지를 두세 곳 더 물색하여 빨리 주민 의견수렴에 들어가야 한다. 2031년까지 8년이 남았으니 지금 시작하면 충분하다. 고준위특별법 제정에 발이 묶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