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노동조합의 회계장부 공개(회계 공시)를 강제하는 노조법·소득세법 시행령이 이달부터 시행한 가운데, 반발하던 민주노총도 결국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시행령이 입법을 통하지 않는 ‘꼼수’이자 노조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부당하다는 입장이 분명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이 같은 결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론 노조가 노동 현안에 집중해 투쟁할 동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노총은 24일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결과 “윤석열 정부의 노조법·소득세법 시행령이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회계 공시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논란의 노조 회계 공시란?
고용노동부는 노조 회계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노조법·소득세법 시행령을 개정해 이달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5일 시행령 입법예고를 다시 한 뒤, 2주 만에 속전속결로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정부는 당초 시행령을 내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이를 석 달 앞당긴 것이다.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시기를 앞두고 전격 시행하면서, 시행령에 반발하던 노조에 대한 압박 수위를 더 높였다.
시행령의 골자는 정부가 운용하는 시스템에 회계 공시를 하지 않은 노조 소속 조합원에 대해 조합비 15% 세액공제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이다. 기존 제도는 노조의 회계 공시 여부와 무관하게 노조비를 지정기부금으로 분류해 납부한 금액의 15%(1천만원 초과분은 30%)를 세액에서 공제했다.
정부는 회계 공시 의무를 조합원 1천 명 이상 노조에만 부여했다. 다만, 상급단체가 회계를 공시하지 않으면 산하 조직도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연좌제’ 방식을 채택하면서 노조를 더욱 옥죄었다.
이에 따라 조합원 1천명 이상 노조와 상급단체가 2022년 치 결산 결과를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노조 회계 공시 시스템’에 공시해야만 개별 조합원이 올해 10~12월에 내는 조합비에 대한 세액공제를 내년 초 이뤄질 연말정산을 통해 받을 수 있게 된다. 조합원이 속한 단위노조(사업장 노조 등)가 산별노조나 민주노총·한국노총 같은 총연맹에 가입된 경우엔 이들 모두 회계를 공시해야 세액공제가 적용된다.
실제 회계 공시 의무를 지는 노조는 한국노총 가맹 노조와 산하 조직 303곳, 민주노총 가맹 노조와 산하 조직 249곳을 포함해 총 673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 시행령 발표 당시 “직접 대상인 조합원 210만명, 간접 영향권에 있는 조합원까지 모두 290만명이 (시행령 개정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느닷없이 시행령을 개정한 의도는?
정부의 시행령에 민주노총은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는 물론 사용자 등에 노조의 재정 상황이 공개되면 노조의 자주성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행법으로도 노조는 결산 결과와 회계 감사 자료를 조합원에게 공개해야 하는 만큼, 정부의 시행령 개정은 ‘과잉 입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정부가 국회 입법이 아닌 ‘시행령 개정’이란 우회 방식을 선택하면서 ‘꼼수 입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행정부 권한인 시행령 개정은 국회의 입법 논의를 피할 수 있어 속전속결로 변경이 가능하지만,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당사자 설득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민주노총은 현행법대로 결산 결과와 회계 감사 자료를 조합원에게 공개해 온 만큼, 정부의 시행령 개정에는 다른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본다. 정부가 회계 공시를 거부하는 노조를 ‘부패’, ‘이권 카르텔’ 프레임에 가두면서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거나 탄압하려 한다고 본 것이다.
이미 정부는 건설노조의 정당한 노조 활동도 조폭과 다름없는 ‘건폭’으로 몰아세우며 노조 자체를 싸잡아 부패집단으로 몰아세운 전례가 있다. 과거 노조를 ‘이적단체’나 ‘귀족단체’로 몰아세우는 것과는 다른 공격 태세다. 민주노총은 입장문을 통해 “노조법 개정은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본질은 노조 통제에 있다”며 반발했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초 느닷없이 노조의 재정 투명성을 문제 삼으며, 각 노조가 노조법에서 규정한 서류를 비치하고 있는지 점검에 나선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자율점검 결과서와 관련 자료의 표지에 더해 내지 1쪽까지 제출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노조가 서류 비치를 확인할 수 있는 표지를 제출해도, 정부는 이 역시 ‘미제출’로 보고 과태료를 부과했다. 역대 정부에선 없었던 일이다. 양대노총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법을 무시한 초월적 권한 행사”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정부는 아예 회계 공시를 요구하며 세액공제 혜택까지 연동시키는 시행령 개정까지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에 양대노총은 세액공제 박탈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회계 장부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맞섰다. 노조의 민주성과 자주성이라는 근본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노조가 정부의 부당한 방침을 따르기로 한 이유
하지만 노조가 현실에서 부닥칠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총연맹 차원에서 계속 회계 공시를 거부할 경우, 조합원들은 당장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나 총연맹 탈퇴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용노동부는 “노조 압박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노조와 조합원을 갈라치기 하고 노조의 상급단체 탈퇴를 종용하는 셈이다. 기업별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온 산별노조나 총연맹의 입장에선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정부의 노조 탄압에 계속해서 빌미로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는 민주노총이 내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정부의 방침을 수용하고 회계 공시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이다. 민주노총은 “회계 투명성을 빌미로 한 윤석열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 혐오조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조직적 단결을 강화하고 국민의 신뢰를 확대해 윤석열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힘있게 투쟁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믿고 민주노총의 방침과 결정에 따라 투쟁해온 조합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정부의 방침대로 회계 공시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내부적으론 정부 방침을 따리지 말자는 의견도 사실 많았다”며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액공제로 인해 경제적 불이익을 받는 조합원들이 있고, 이들이 민주노총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부연했다.
또한 이 정책실장은 “회계 공시를 이미 조합원들에게 하고 있는데, 정부 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떳떳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공세를 계속할 것”이라며 “일반 국민들의 경우, 정권이 그렇게 떠들어대면 저희가 아무리 ‘사실은 이렇다’고 얘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정권이 노조를 고립시키고 탄압하는 데 회계 공시를 악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향후 노조법·소득세법 개정을 통해 문제를 바로잡아나갈 방침이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이번 결정을 바탕으로 오히려 국면 전환을 꾀할 계획이다. 이 정책실장은 “정권이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고 (부패집단이라고 낙인 찍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는 데 사용할 무기를 없앴다고 본다”며 “앞으로 노동시간, 임금체계 문제 등 정부의 노동개악 추진을 막는 투쟁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내년 총선 때까지 제도 개선을 위한 투쟁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노총도 지난 23일 “회계 결산 결과를 공시하지 않을 시 발생할 조합비 세액공제 혜택 제외 등 조합원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회계 공시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정부의 회계공시시스템에 응하는 것은 현행 법을 준수하고 조합원들의 피해를 방지하고자 함일 뿐, 정부가 개정한 시행령에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나아가 한국노총은 “상급단체가 회계를 공시하지 않으면 산하 조직도 세액공제 대상에서 배제해 사실상 ‘연좌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부분 등에 대해선 헌법소원 심판청구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