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우리 문제를 좀 간단히 생각해보자. 타석에 들어선 야구 선수가 ‘신이시여, 이번 타석에서 꼭 홈런을 쳐서 팀을 승리로 이끌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다 치자. 그런데 기적처럼 그 타자가 홈런을 쳐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감격에 겨운 그 타자가 홈으로 들어오며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한다.
하나도 안 이상해 보이는 광경인가? 천만의 말씀, 나는 이 흔히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 이상하다. 왜냐하면 홈런을 맞아 팀을 역전패의 수렁으로 빠트린 그 투수도 만약 같은 신을 믿고 있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 투수는 신의 벌을 받은 것인가?
투수와 타자의 대결은 제로섬 게임이다. 누구 하나가 이기면 누구 하나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이 게임에서 신에게 나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은 곧 상대의 패배를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이 정녕 이 승부에 관여를 할 것 같은가? 내가 알기로 신은 절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승리를 신이 지켜주소서”라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이 기도는 “상대편 나라의 패배를 신이 이끌어주소서”라는 기도와 마찬가지다. 신이 스포츠토토에 돈을 걸지 않은 한 이런 기도에 응해줄 리가 없는 거다.
수능 당일 “우리 아이가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신께서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도 쓸 모 없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준다면 우리 아이의 경쟁자 누군가를 더 나쁜 성적이 나도록 벌해야 한다. 정녕 신이 그런 존재인가?
신을 팔아먹는 학살자들
이게 스포츠나 시험에 국한된 이야기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데, 국가 간 전쟁으로 확산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전쟁이 벌어지면 거의 모든 나라 국민들이 자기가 믿는 신에게 자국의 승리를 빌며 소원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다른 말로 곧 타국의 패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타국의 무고한 민중들을 더 많이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체 어떤 신이 이따위 기도를 들어준단 말이냐?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데우스 불트(Deus vult)라는 라틴어 구절이 있다. “신이 전쟁을 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가톨릭의 159대 교황 우르바노 2세였다. 그리고 교황의 이 선언으로 200년에 걸친 중세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다.
이게 정녕 신의 뜻이었단 말인가?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명목으로 벌인 그 전쟁에서 적게는 수십 만 명, 많게는 100만 명 넘게 사람이 죽었는데? 신이 정녕 그것을 원했다면 그게 어찌 신인가? 학살자지.
이 뿐 아니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들이 신교와 구교의 전쟁이었다. 똑같은 신을 믿는 자들이 똑같은 신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를 한다. “상대를 더 많이 죽여주소서”, “저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모소서”라며 말이다. 신이 그 기도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겠나? 내가 신이라면 “이것들이 진짜 쳐돌았나?” 싶었을 것이다.
선민의식이 낳은 참상
“신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그릇된 선민의식은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명화 미션(Civilizing mission)이라는 것이다. 발달된 유럽의 문명을 미개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전파해 그들도 문명화를 시켜줘야 한다는 개떡 같은 주장이다.
그런데 이 문명화 미션은 중세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을 ‘문명화되지 않은 곳’으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으로 자기들끼리 비장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은 1415년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Ceuta)를 점령하는데, 당시의 주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이슬람 지역에 기독교를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을 비롯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의 민중들을 노예로 사고파는 참상을 벌이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다는 황당한 기치를 앞세웠다.
문명화 미션의 결정판이 ‘백인의 짐’이라는 개념이다. 1907년 당시 최연소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몰라도 ‘정글 북’이라는 책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바로 정글북의 저자가 키플링이다.
그런데 키플링은 1899년 2월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 너의 세대 중 선택된 자를 멀리 보내라 / 자녀들을 유배지로 던져라 / 포로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 잘 무장한 채로 야만적이고 유랑하는 민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 방금 정복한 너의 백성들은 / 반은 악마, 반은 어린 아이
평화롭게 잘 사는 사람들을 정복해 놓고 ‘방금 정복한 너의 백성들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 아이’라고 지껄인다. 그리고 그렇게 식민지를 침탈하는 것이 ‘백인의 짐이자 책무’라고 주장한다. 이게 바로 전쟁을 일으키고, 수탈한 나라의 민중들을 죽이며, 그로부터 배를 불리는 제국주의자들의 선민의식이다. 실로 가증스럽지 않은가?
참고로 키플링이 이 ‘백인의 짐’이라는 시를 발표한 때는 미국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였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미국이 벌인 이 참혹한 전쟁을 보며 극렬한 반전주의자가 됐다. 그리고 트웨인은 키플링의 ‘백인의 짐’에 대해 “신이시여, 이 야만적인 백인들을 위하여 제발 기도해 주십시오. 백인들의 무식한 짐으로 피가 넘칩니다”라는 기도를 올렸다.
중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나는 국제정세를 분석할 능력이 매우 부족해 이 전쟁의 원인과 전망에 대해 그 어떤 평가를 내 놓을 정도의 지식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중동에서 벌어진 숱한 전쟁과 그로 인한 수많은 민중들의 죽음 저 뒤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은 우리를 선택했다”는 그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는 점 말이다.
신이 과연 자신의 피조물 중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선택하지 않는단 말인가? 학교 선생님도 학급 안에서 학생들을 차별하면 사고가 터지는데, 하물며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라는 참혹한 명령을 어찌 내린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단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신이 도대체 어떤 신인지는 내가 잘 모르겠는데, 만약 신이 너네 민족만을 선택했다면 그건 절대 창조주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냥 동네 박수무당이지.
그래서 나는 전쟁을 일으키며 신의 뜻은 운운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우리가 전쟁이라는 주제에 대해 신에게 소원할 것은 오직 하나다. 신이시여, 이 전쟁을 멈추시고 아무도 죽게 하지 마옵소서. 저들이 지금 신의 피조물을 죽이며 신의 뜻을 참칭하고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