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남은 흔적을 남긴다.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건 처음 만나는 대상이건 만남은 마음과 몸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삶은 그 그림자를 맞이하는 일이고, 떠나보내는 일이고, 간직하는 일이다. 여행도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건 중 하나다. 아무리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미리 뒤져보아도 처음 마주하는 지역과 공간은 그 곳에 온 사람을 예고 없이 엄습한다. 그 돌연한 충돌이 바로 여행의 핵심이다.
충돌은 한 사람의 삶과 철학이라는 프레임을 통과하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작동시키거나 버리지 않고 새로운 충돌을 받아들여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다.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밴드 양반들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 그 곳의 자연이 먼저 보이는 이유다. 그 땅의 기운과 생명이 노래가 되는 이유다. 지리산을 마주한 다음에는 [바람과 흐름] 음반이 나왔고, 해남을 거닌 후에는 [에루화] 음반이 탄생했다. 그리고 모하비 사막의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을 만난 양반들은 [New Moon]이라는 새 음반을 발표했다.
양반들의 음반 가운데 전례 없이 영어 가사가 많은 결과 또한 미국 여행이 남긴 그림자일까. 이들은 미국의 도심에서 노닐거나, 선망하던 록스타의 흔적을 뒤쫓지 않는다. 대신 바람과 모래, 바위와 햇볕이 넘치는 사막을 서성거리면서 대자연을 마주한다. 참으로 양반들다운 발걸음인데, 이들은 자연에 잠기면서 서울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하고, 달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정복하고 즐기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가만히 느끼는 대상, 존중하고 경외하는 대상으로서 자연과 감응하는 이야기가 음반의 리드미컬한 곡들에서 계속 펼쳐진다.
양반들 (Yangbans) - California Sunshine Official Music Video
황시몬의 색소폰을 동반한 ‘California Sunshine’은 드넓은 공간을 조망하고 재현하듯 느긋하고 여유롭다. 바로 이 질감이 노래를 만든 양반들이 여행을 통해 받은 인상과 파장 가운데 거르고 다듬어 내놓은 이야기 아닐까. 모든 순간과 감정을 다 노래할 수 없어 양반들 또한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취향의 프레임을 통과하고 남은 이야기만 음악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곡 ‘Moon Salutation’에서도 속도감과 공간감이 곡의 무드와 스케일을 결정한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광활함으로 초대하는 듯한 곡의 인트로는 밤의 기운으로 물들어간다. 코러스를 동원하고, 곡의 리듬을 떨어뜨리면서 보여주려는 세계는 태양의 시간이 아니라 달의 시간이다. 선명하지 않아 신비로운 세계로 변화하는 세계에 압도당한 감각을 노래하는 곡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념과 태도를 되묻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Desertification’는 오늘 인류가 맞이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양반들은 이 노래를 날마다 파괴되어 가는 지구를 고발하는 곡으로만 완성하지 않았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그러했듯 존재의 본질적인 목마름을 토로하는 곡은 호쾌하고 드라마틱한 록 음악으로 뻗어나간다. 한국 토종의 질감을 앞세우며 양반들을 알렸던 곡과는 다른 사운드다. 이번 음반에는 이처럼 연주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곡들이 여럿이다.
그 중 ‘Oyster Bar’와 ‘행복의 나라’는 양반들의 남다른 세계관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곡이다. 하늘님, 용왕님, 햇님, 달님 같은 노랫말로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라고 노래할 때, 노래는 낯선 외국에서도 똑같은 합일의 열망을 드러낸다. 신명이 느껴지는 곡은 낯선 공간을 품는 양반들의 태도가 넉넉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충분히 내비친다. 함께 춤을 출 때 찾아오는 평화와 안식을 질박하게 펼치는 5분 26초의 시간은 세상 어느 곳에 가도 여일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양반들의 시선이 일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리의 작가로서 양반들의 솜씨가 능숙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곡 ‘행복의 나라’는 이들이 노랫말과 연주로 세운 행복의 나라다.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만 같은 여유로움으로 인도하는 곡은 자신들이 “로큰롤의 도(道)”라는 노랫말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노래는 그렇게 바뀐 세상의 감각을 미리 체험하게 만들 수 있다. 자신들이 체험한 시공간과 그 경험을 채집한 감각을 음악으로 공유하는 양반들의 새 음반은 자신과 같은 태도를 취하라고 조언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태도와 감각을 매력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빠져들게 만든다. 이렇게 살아보고 싶어지고, 이렇게 느껴보고 싶어진다. 음악이 할 수 있는 일, 음악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은 이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