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여유와 설빈의 새 음반, 정규 3집 [희극]을 처음 들었다. 음반이 나온 걸 알고도 십 여일쯤 미뤄놓았다가 무심히 듣기 시작했는데, 세 번째 곡 ‘메아리’를 들으면서부터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여유와 설빈이 그동안 계속 좋은 음반을 발표하고 멋진 공연을 펼쳐왔음에도, 올해의 음반으로 꼽을 만큼 빼어난 음반을 내놓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는데, 이번 음반은 달랐다. 이 정도면 올해의 음반으로 꼽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노랫말을 확인하지 않고, 음악만 들으면서 이런 판단을 한 이유는 음반에 담은 9곡 내내 아름다운 순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정규음반의 경우 타이틀곡 이외의 곡들이 고르게 완성도 높게 느껴지는 경우는 적다. 그런데 이 음반은 두 번째 곡 ‘너른 들판’부터 ‘메아리’, ‘거울을 봤어요’, ‘밤하늘의 별들처럼’으로 이어지는 곡들 모두 쓸쓸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멜로디는 매끄럽고 보컬은 잔잔한데, 여유와 설빈이 이대봉, 강경덕 등과 함께 조율하고 연출한 소리들은 익숙한 음악 너머의 아름다움을 향해 안개처럼 나아간다.
여유와 설빈 (Yeoyu and Seolbin) - 희극 (COMEDY)
기실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노래한다고 할 수 있을 포크 음악을 대동소이한 음악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여유와 설빈의 [희극] 같은 음반이 꾸준히 이어지는 탓이다. 이들은 베이스, 트럼펫,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오르건, 멜로디카 같은 악기를 적시적소에 배치함으로써 노래마다 남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첫 곡 ‘숨바꼭질’의 간주에서 현악기 연주가 밀려드는 순간이라던가,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꿈결처럼 밀려드는 곡에 베이스 기타와 건반의 앙상블을 안겨주는 ‘너른 들판’는 그 세계의 현현이다. ‘메아리’에서 트럼펫 연주를 가미한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멜랑콜리한 노래에 헤어 나올 수 없는 여운을 불어넣는 편곡은 음악을 어떻게 구성하고 연결해야 하는지 고심하며 분명하게 이해한 예술가의 산물이다. 이들은 좋은 기초와 뼈대를 가지고 있는 곡에 적절한 연주를 가미함으로써 신비로운 소리의 비경을 완성한다.
그래서 이 음반은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들어야 한다. 다른 일을 하면서 BGM처럼 들었다가는 음악이 완성되고 피어나는 순간을 놓칠지 모른다. 가령 ‘희극’에서 멜로디카 연주가 눈송이처럼 소복소복 쌓이는 순간을 놓친다면 이 음반을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른 곡들에도 이렇게 화룡점정의 순간이 이어진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음악가가 소리의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음악은 귀를 기울여 만나는 시간의 예술임을 확인하는 음반이다.
여유와 설빈은 그 시간 속에 기다리고 꿈꾸고 좌절하고 헤매는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너른 들판으로 뛰어가서 / 파란 하늘 보며 울었네”(‘너른 들판’), “우린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어 / 부끄럽지 않은 척하기도 지쳐”(‘너른 들판’)라는 슬픔과 “세상은 너무 차가워요”(‘메아리’)라는 막막함이 음반에 함께 들어있다. “떠나자 뒤는 보지 말고 / 앞만 보고 걸어가자”(‘메아리’)는 독한 마음과 “수상한 세상에서 / 환멸을 느낄 때 / 멸망을 노래하자”(‘희극’)는 투지 또한 공존하는 음반이다. “삶이여 내게로 / 여기로 와주소서”라고 노래할 때 얹은 트럿펫 연주는 고단한 평화처럼 울려 퍼진다.
여유와 설빈 ⓒ여유와 설빈 인스타그램
여유와 설빈의 3집 속 노래는 이처럼 정직하다. 익숙한 낙관, 상투적인 표현으로 숨지 않는 노래들이다. 근본적으로 삶은 고단한데, 지금처럼 사회 전체가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있을 때는 더더욱 고통스러워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춤추고 노래 부르며 기도하려 해도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밤하늘엔 아직 별들이 있”지만 그 별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일조차 힘에 부치는 시대에 여유와 설빈은 허무해지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쟁 없는 전쟁터 속에 / 죄인이 되어 가”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 처연한 정직의 의지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소금 역할을 하지 않을까. 외면하고 부정하고 도피하는 대신 마주하고 고백할 때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듣게 되는 음반이다. 파격과 도전은 없지만, 진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노래하는 음악은 눈물 자국을 감추지 않고 온힘 다해 노래하며 ‘저 너머의 빛’을 응시한다. 그 목소리로 인해 오늘을 견딜 힘이 자라난다. 슬픔의 힘이다. 음악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