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났다. 다들 수고 많으셨다. 시험 결과가 어쨌건 다만 몇 주 만이라도 수능이라는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나 인간다움을 만끽하시길 소망한다.
나는 수능이라는 괴물 같은 시험 하나에 청춘을 바쳐야 하는 이 비극적인 사회가 너무 슬프다. 협동과 배려가 아니라 경쟁과 쟁투부터 배우는 우리의 청춘들이 안타깝다. 단언컨대 이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따위 세상을 청춘들에게 물려준 기성세대의 죄가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 앞에서 늘 죄인의 심정으로 산다.
달러 경매 게임
경제학 이론 중에는 ‘달러 경매 게임(Dollar Auction Game)’이라는 것이 있다. 예일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마틴 슈빅(Martin Shubik)이 고안한 게임이다.
아시다시피 경매란 보통 물건을 팔 때 쓰는 방식이다. 최고가를 부른 입찰자가 경매품을 살 자격을 얻는다. 승자만이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다.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런데 슈빅 교수가 고안한 경매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다. 첫째, 경매에 올린 물건의 가치가 정확하게 산정된다는 점이다.
보통은 경매에 올라온 물건의 가치가 정확히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게 경매의 묘미다. 그런데 슈빅 교수가 경매에 올린 물건은 다름 아닌 10달러짜리 지폐였다. 이 지폐의 가치는 무조건 10달러다. 그 누구도 이 지폐를 10달러 이상으로 고평가하거나 10달러 이하로 저평가할 이유가 없다.
둘째, 이 경매 역시 승자가 10달러를 갖는 것까지는 기존 경매와 규칙이 동일하다. 그런데 이 경매에서 패배자, 즉 최고가를 부르지 못한 참가자들은 자신이 부른 돈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 예를 들어 9달러를 부른 사람이 승자고, 8달러를 부른 사람이 패자라면, 승자는 10달러 지폐를 갖지만 패자는 8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협상의 정석>의 저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인 맥스 베이저만(Max H. Bazerman)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이 경매를 실시했다. 경제·경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베이저만 교수가 10달러짜리를 경매에 올린 뒤 “1달러에 참여할 사람!”이라고 물어보면,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든다. 아마 그는 ‘1달러를 내고 10달러를 얻으면 개이득이지. 안 할 이유가 없잖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호가가 2달러로 올라도 누군가가 손을 든다. 그도 1달러에 손을 든 자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이처럼 경매는 호가가 9달러에 이를 때까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된다. 9달러를 내고라도 10달러를 획득하면 여전히 이익이다.
그런데 호가가 10달러에 이르렀을 때부터 혼돈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이 멍청한 짓을 도대체 왜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0달러를 내고 10달러를 받는 게임은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호가가 10달러에 이르자 8달러에서 손을 들었던 참가자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10달러 호가에도 참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10달러 참여를 포기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8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손해가 너무 막심하다.
다음 호가(11달러)가 되면 여기서부터는 진정으로 코미디가 된다. 11달러를 내고 10달러를 받아가는 바보들의 대행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9달러에 손을 들었던 참가자가 즉각 11달러에 동참한다.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경매 참여를 포기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9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게임은 호가가 80달러를 넘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자들이 80달러를 내고 10달러를 받아가는 바보들의 대행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실제로 베이저만 교수는 매년 이 경매를 실시해 10년 동안 대학원생들의 코 묻은 돈을 무려 1만 7000달러(약 1800만 원)나 뜯어냈다고 한다.
패자를 징벌할 때 생기는 사회적 비효율
도대체 이 게임의 어떤 면이 참가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 경매의 패자에게 엄청난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패자에게 벌을 주는 순간 사람들은 패배하지 않기 위해 온갖 비효율적인 짓을 하기 마련이다. 패배자에게 내리는 벌이 가혹할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회사에서 신상필벌 원칙을 강화한답시고 인사고과를 매긴 뒤 하위 인사고과자를 해고하는 짓은 미친 짓이다. 그렇게 하면 노동자들이 일을 열심히 할 것 같은가? 실력이 늘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 내 경험상 저런 제도를 도입하면 업무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상사한테 아부하는 기술이 는다. 일을 해야 할 시간에도 어떻게 하면 아부를 잘 해 상사 눈에 들까를 고민한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6일 서울 용산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2023.11.16. (사진공동취재단) ⓒ뉴스1
더 처참한 것은, 동료들을 음해하고 험담하는 실력(!)까지 덩달아 는다는 데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인사고과를 못 받으면 해고되기 때문이다. 해고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동료를 음해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이 나라 교육제도가 멍멍이판이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능을 못 치면, 혹은 좋은 대학을 못 가면 사회가 벌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유럽 국가들을 보라. 그 나라에도 경쟁이 있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의사나 변호사가 돼 좀 더 잘 살 기회를 누린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는 대학을 못 갔다고 우리처럼 벌을 주지 않는다. 생존의 기회를 빼앗지도 않는다. 경쟁에서 져도 인간답게 살 수만 있다면 남을 음해하고 사교육에 목숨을 거는 비효율이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세계적인 교육 강국 핀란드의 대학 진학률은 고작 40%다. 기술 강국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30% 남짓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나? 이런 나라에서는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고 벌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70%를 육박하는 우리의 대학 진학률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사는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마트 노동자들의 투쟁기를 그린 <송곳>이라는 만화가 있다. 이 만화에서 한 노동자가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쩌라고요. 본인이 책임져야죠!”라며 동료 노동자들의 처지를 비웃듯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만화의 주인공인 노동 운동가 구고신은 이렇게 답을 한다.
“패배는 죄가 아니오. 게다가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평범한 거요. 우리의 국가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렇다. 패배는 죄가 아니다. 수능을 못 치는 것은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니란 말이다. 대학을 못 가는 것 또한 그 어떤 잘못을 한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그냥 좀 평범한 거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벌을 준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벌을 주는 사회의 잘못이다.
단언하는데 우리는 벌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평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그 어떤 사회 제도도 거부해야 한다. 이 사회의 교육 제도를 뿌리부터 다 뜯어고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