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단죄했던 ‘국정농단’ 지워가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3.10.10.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지명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정형식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이던 2018년 2월 국정농단 사건 관련 수십억대 뇌물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구속돼 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항소심에서 거침없이 석방시켜줬던 사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주범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맡아 이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하는 것을 주도한 인물이다. 국민들은 직접 촛불을 들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헌정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윤 대통령의 이름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국정농단 사건은 분노한 국민의 심판과 그에 따른 법률적·헌법적 판단에 의해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 만큼, 사건의 본질을 퇴색시킬 수 있는 행위에는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정형식 부장판사를 헌법재판관으로 발탁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인식과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국정농단 지우기, 당선 이후부터 이어지고 있다


비단 정형식 판사를 발탁한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당선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국정농단을 지워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떠한 국민적 합의도 동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 시작은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작년 4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구 사저를 직접 찾아가 국정농단 사건 수사와 관련한 사과의 말을 전하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회복’까지 약속했던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구 달성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인사하고 있다. 2023.11.07 ⓒ대통령실 제공

그때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에게 “굉장히 죄송하다”,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 등 사죄의 말을 연거푸 늘어놓았다고 배석자들은 전했다. 아울러 박 전 대통령의 재직 중 업적을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국정농단 사건과 무관한 재직 시절 업적은 그것대로 평가받는 것이 필요할 수 있으나, 자신의 단죄 행위를 사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대중에게 왜곡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행보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취임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조윤석 전 정무수석 등을 비롯한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건이나 블랙리스트 사건 연루자들도 대부분 복권시켰다.

국정농단 지우기의 정점은 이재용 회장에 대한 사면권 행사다. 윤 대통령은 취임한지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작년 8월 광복절 특사 명단에 이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국정농단에 연루됐던 재계 핵심 인물들을 포함시켰다.

이러한 사면이 있었기에 적어도 윤석열 정부 내에서는 이 회장을 석방시켜준 정형식 판사를 헌재 재판관으로 발탁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이끌던 서울중앙지검은 이 회장 항소심 판결 당시 “이재용 (당시)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법리상으로나 상식적으로 대단히 잘못된 판결”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이 말을 기자들에게 한 사람은 현 정부 핵심 내각에 있는 사람이다.

이달 초에는 윤 대통령이 조희대 전 대법관을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는데, 조 전 대법관 역시 국정농단 사건 관련 판결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9년 8월 다수 의견으로 이재용 회장 뇌물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지만, 조 전 대법관은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인 경영권 승계작업과 관련해 “특검이 법원에 제출한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보더라도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소수의견을 냈던 인물이다.

국정농단 사건 핵심 인물 최순실의 ‘미르·K스포츠재단’이 민간기업 돈을 끌어모으는 가교 역할을 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해체 여론이 강하게 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전경련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경제단체와 ‘첫 도시락 회동’을 주관한 것을 시작으로, 전경련은 윤 대통령의 주요 순방길에 동행하며 위세를 회복해나갔다. 전경련은 급기야 올해 5월 굴욕적인 한일 강제동원 피해 배상금 3자 변제 합의안과 연계된 ‘한일미래기금’을 조성하는 것을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와 공동으로 주도하면서 굴욕 외교 방패막이 역할도 자임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는 스스로 입만 열면 강조해온 공정, 정의, 법치 등 가치에 관한 최소한의 형식적인 정당성마저 퇴색시킨다. 동시에 이러한 가치 및 원칙들에 대한 파괴 현상이 국정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윤 대통령은 작년 12월 뇌물 수수 및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17년이 확정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한 데 이어,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유죄 판결을 확정받은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사면해 자신의 궐위로 치러지는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기이한 광경을 이끌어냈다. 대선개입으로 유죄가 확정돼 복역중이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도 풀어줬다. 기밀 자료를 빼돌려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간첩사건을 조작해 내부 징계를 받았던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 등 범죄의 주역들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원칙 파괴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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