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인 11월 20일, 누구나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제도 안에서 성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의 발의가 예고됐다. 성별 정정을 희망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 수술을 강요하지 않고,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자는 다짐이 담겼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박한희 집행위원,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 이연수 활동가, 한국성폭력상담소 닻별 활동가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대표 발의하는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안’에 관해 소개했다.
현행 제도상 성소수자인 트랜스젠더가 국가로부터 성별 정정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난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로 세워진 사무처리 지침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제도 미비로 별도의 적용 법안이 없는 탓이다. 이때 법원은 외과적 성전환 수술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성별 정정 ‘신청’을 가능하게 했다.
장 의원은 “트랜스젠더 시민들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법적 성별을 변경하는 문제는 존엄의 문제”라며 “지금껏 한국 사회는 성별 정정 등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해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지 못했고, 엄격한 성별 정정 기준 및 절차 그리고 법원과 법관에 따라 달라지는 비일관성에 존재했다”고 밝혔다.
장 의원이 발의를 앞둔 법안은 제정안으로, ‘성별의 법적 인정에 있어 성전환 수술을 포함한 의료적 조치는 요구되지 않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성별의 법적 인정’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인식하고 살아가는 성별과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을 일치시키기 위해 변경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성전환 수술 여부뿐만 아니라 혼인 여부, 자녀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성별의 법적 인정을 받도록 했고, 의사 능력이 있는 미성년자도 단독으로 성별의 법적 인정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신청인은 성별 법적 인정 신청과 동시에, 또는 그 신청의 심리 중에 개명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앞서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수술 등 외과적 처치로 판단하는 건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며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과 관련한 요건, 절차, 방법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에 장 의원은 “젠더 이분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혐오와 차별에 고통받는 트랜스젠더 시민들을 위해 21대 국회가 해내야 할 일이 바로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라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비롯해 원내 정당 모두가 더 이상 트랜스젠더 시민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이 법안의 논의에 함께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박한희 집행위원도 “세계적인 추세를 보았을 때 법안의 논의는 너무 당연하지만 늦은 것이기도 하다. 이제 국회의 시간이다. 아직 21대 국회는 6개월이 남아 있다”며 “이 법은 또 하나의 성소수자 권리 증진에 있어 역사적인 한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연수 활동가도 “이 법이 통과된다면 의료적 조치나 성기 수술을 하지 않아도 성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트랜스젠더들이 그 압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며 “트랜스젠더도 동등한 사람이라면, 이 법은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자료사진) ⓒ뉴스1
지난 국회에선 17대 당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변경 불이익을 막기 위해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한 바 있지만, 의회의 소극적인 논의 속에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현재까지 장 의원의 법안에는 장 의원을 비롯한 정의당 의원 6명과 진보당 강성희, 기본소득당 용혜인, 무소속 윤미향 의원 등 9명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상태다. 여야 의원 모두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 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법안이 정식으로 발의되기 위해서는 최소 10명 의원의 동참이 필요하다. 장 의원실은 고심 중인 의원들의 막판 설득 작업을 마치는 대로 법안을 곧장 발의할 예정이다.
한편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은 지난 1998년 11월 28일 미국에서 증오 범죄로 살해된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 리타 헤스터(당시 34세)를 추도하던 것에서 유래한다. 매년 이날, 그릇된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따른 혐오, 차별, 억압으로 희생당한 트랜스젠더를 전 세계에서 추모하고 그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기억하며 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