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국회의원 총선거 때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거대양당의 야합으로 다시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퇴행할 수 있다는 위기에 직면했다. 당초 여당인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병립형으로 회귀 주장이 강하게 제기된 가운데,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의석수 계산에 골몰한 나머지 국민의힘의 선거제 퇴행 주장에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이 병립형을 주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민의힘이 영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득표 비례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병립형으로 선거를 치러야 그나마 소수정당들이 얻는 비례 득표를 민주당과 나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압도적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민주당이 동조하지 않으면 병립형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 문제는 민주당의 분명하지 않은 입장이다. 현시점에서 여당이 주장하는 병립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건 여당과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당내 일각에서는 민주당 지도부가 여당과 병립형으로 돌아가는 데 합의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비례위성정당 우려가 있을 텐데 이미 여러개 발의돼 있는 위성정당 방지법을 처리하면 된다. 물론 그럼에도 국민의힘에서 꼼수로 위성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국민에게 당당히 심판을 요청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수당 기득권을 포기해서라도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겠다는 의지다.
지금 국면에서 중요한 건 원내 1당인 민주당이 선거제 퇴행 흐름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입장이 분명하면 된다. 그랬을 때 당 지도부는 물론 의원들이 반대할 명분은 없다. 이미 민주당은 대선이 한창이던 작년 2월 국회의원 연동형·권역별 비례대표제, 위성정당 방지, 기초지방의원 선거 3인 이상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선거제 개혁과 관련한 당론을 채택했고, 이재명 대표 역시 이러한 내용을 대선 공약으로 분명히 못 박았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의중이 공식적으로 명확히 확인된 건 아직 없다. 다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달 초 이재명 대표와 만난 이부영 ‘검찰독재·민생파탄·전쟁위기를 막기 위한 전국비상시국회의’(이하 비상시국회의) 상임고문은 이 대표가 연동형 비례제 유지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우려했다. 재야 민주화운동 원로들로 구성된 비상시국회의는 지난 9일 이재명 대표를 찾아 연동형 비례제 유지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비상시국회의는 다음날 긴급성명을 내고 이 대표에게 “윤석열 정권의 폭거를 막기 위해서뿐 아니라 민주당이 진보정당을 비롯한 소수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를 혁신해야 한다는 시민의 뜻을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20일 민주당 의원 40여명과 진보정당 의원, 비상시국회의 등이 국회에서 연 토론회에서는 선거제 퇴행을 막는 것에서 나아가 윤석열 정권의 폭주를 심판하고 정치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연대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여럿 나왔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판단한다. 작은 이익에 굴복하기보다 국민을 믿고 정권심판과 정치개혁의 큰 길을 열어나가는 것이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게도 더 큰 결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