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보신각에서 열린 ‘주거권 지금당장! 2023 세계주거의날 ⓒ필자 제공
빈대와 한파에 대한 대책
고시원을 시작으로 쪽방과 숙박시설, 목욕탕과 가정집에 빈대가 출몰했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빈대 정부합동대책본부”를 만들었고, 빈대 출몰이 많은 지자체에선 “빈대와의 전쟁”까지 선포했다. 엄청난 대응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라는 것과 고온살균 집중방역을 한다는 내용 정도, 고시원과 쪽방에도 마찬가지다. 빈대에 대한 대책은 공중방역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고시원과 쪽방과 같은 공간에 출몰하는 빈대에 대한 대책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빈대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기 전부터 고시원과 쪽방에서의 해충 출몰은 정도가 다를 뿐 계속 있었던 문제다.
‘고시원에 바퀴벌레와 진드기가 너무 많아서 살에 닿으면 피를 빨아 먹는데, 죽이면 피를 막 흘린다. 못 살겠다.’ 2021년 10월 4일 세계주거의 날 K씨가 한 발언이다. K씨가 살았던 고시원에는 80명이 공동으로 생활했지만, 세면장이 3개, 화장실이 2개, 세탁기가 2개뿐이었다. 개별 위생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고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공간에 집중방역을 한들, 빈대는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주거권의 문제다.
겨울을 앞두고 있음에도 빈대로 인해 살충제 매출액이 치솟았다고 한다. 더불어 겨울철 고시원과 쪽방에 대한 동절기 대책이 발표되고 있다. 내의와 이불, 연탄과 난방, 방한용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한랭질환의 발생 장소는 길가가 27.5%로 가장 높고, 집이 16.5%로 두 번째다. 거리나 고시원과 쪽방같이 적정온도의 난방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우 한랭질환을 피하기 어렵다는 당연한 이야기다. 이 역시 주거권의 문제다.
2023년 11월 15일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된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한 매입임대주택 정책 내팽개친 SH공사 규탄, 공익감사청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필자 제공
공공임대주택 예산삭감
한국은 집을 중심으로 한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다. 지난 5년간 고시원, 쪽방, 여인숙 등 집이 아닌 공간에서 살고있는 가구가 44만으로 20% 증가했고, 반지하와 옥탑,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공간에 사는 주거 빈곤층이 180만에 달한다. 장기공공임대주택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는 빈곤층의 주거권 보장을 위해 필수적이고 주거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정책이다. 하지만 한국의 장기공공임대주택 재고율은 약 5%에 불과하다. 예산을 대폭 늘려도 모자랄 판에 윤석열 정부와 국회는 올해에 이어 내년도 공공임대주택 예산삭감에 합의했다.
특히나 대규모 택지개발을 통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불가능한 도심에서 기존 주택을 공공이 매입해 공급하는 매입임대주택 예산은 2022년에 비해 3조원가량 삭감됐다. 서울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2024년도 장기공공임대주택 예산은 2022년과 비교해 1.8조원이 삭감된 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더불어 김헌동이 SH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이후 서울시의 매입임대 주택 공급실적이 2022년도 16.5%, 올해는 7월 기준 2%로 급감하고 불용액이 4천억원에 달한다.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사업 미승인 비율 역시 올해 7월 기준 93%로 높다. 작년 ‘반지하 폭우 참사’와 사회적 재난인 ‘전세사기’에 대한 대책으로 공공임대주택을 제시하면서 예산은 삭감한다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태다.
K씨는 올 10월 매입임대주택을 신청한 시점으로부터 3년 만에 입주했다. 최초 LH 매입임대주택을 신청하고 기다린 세월이 2년이다. 공급이 없으니 공가가 나지 않았다. 공가가 났다는 소식에 달려갔지만, 고시원과 다를 바 없거나 관리비가 터무니없이 비싼 집이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SH 매입임대주택을 신청해 1년을 기다린 끝에 K씨는 공공임대주택 입주민이 되었다. K씨가 거리와 쪽방, 고시원을 전전하며 주거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마주했던 위기의 일상은 3년보다 훨씬 더 엄혹하고 긴 세월이었다. 부족한 수량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행 매입임대주택은 최장 입주기간을 20년으로 정하고 있다. 내년이면 매입임대주택 제도 도입으로부터 20년이 된다. 최초에 입주했던 이들의 입주기간이 종료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한 것이다. L씨 역시 그렇다. 그가 매입임대주택 거주기간 종료로 퇴거 된다면, 300만원의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장기공공임대주택의 거주기간은 통상 30년이다. 최근 매입임대주택과 같이 주거취약계층에게 공급하는 전세임대주택의 입주 기간도 최장 30년으로 상향됐으나, 매입임대주택은 포함되지 않았다. L씨는 매입임대주택 입주민들과 함께 “오래살자 공공임대” 모임을 꾸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입주기간 연장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2023년 9월 23일 기후정의 행진에 참여한 오래살자 공공임대 주민모임 회원이 ‘매입임대 주택 입주기간을 20년에서 30년으로 확대’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필자 제공
내놔라 공공임대
거리와 쪽방, 고시원,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세입자들의 이사 걱정과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까지,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마주하는 삶의 위기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시원과 쪽방과 같이 집이 아닌 공간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다. 집이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권리로서 모두에게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주거권이 보장되는 사회였다면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을 위기다. 주거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선 주택임대차보호법과 주택과 개발 관련 법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공공임대주택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공공임대주택이 재고율이 5%가 아니라 50%를 보유하고 있는 사회라면 집주인의 마음대로 임대료 상승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재고율 5%가 공공임대가 아니라 민간임대였다면 집으로 돈 버는 사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