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두 차례 연기 끝에 21일 의대 입학 정원에 대한 각 대학의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증원 규모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현장 조사 등을 거쳐 연말연초에 결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남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1일 교육부와 함께 지난달 27일부터 이번달 9일까지 2주간 전국의 40개 의대를 대상으로 실시한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는 이들 대학에 2025년~2030년 6개년 동안 희망하는 의대 증원 폭을 최소치와 최대치로 나눠 제출하도록 했다. 최소치는 각 대학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량만으로 바로 증원이 가능한 규모를 의미하고, 최대치는 대학이 추가 교육여건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제시한 증원 희망 규모를 말한다.
조사 결과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 시험을 치르는 2025학년도 입시에 대한 대학들의 증원 희망폭은 최소 2천151명, 최대 2천847명이었다. 3천58명인 현재 정원 대비 70.3~93.1% 늘리자는 것이다. 조사 대상 기간 중 가장 나중인 2030년도 희망 증원 폭은 2천738명~3천953명이었다. 현원과 비교해 최소 89.5%, 최대 129.3% 증원을 희망한 것이다.
대학들이 희망한 의대 증원 수요는 당초 정부나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큰 폭이다. 정부는 2025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1천명가량 늘리는 방안을 고려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수요조사로 집계된 희망 증원 폭은 그대로 정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고사항일 뿐이다. 보건복지부는 의학교육점검반을 꾸려 의학계, 교육계, 평가전문가 등과 함께 수요조사 결과의 타당성을 점검하고 있다. 필요 시 현장 조사도 나설 계획이다.
보건복지부는 의학교육점검반의 검토 결과를 참고하고 지역의 인프라와 대학의 수용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2025학년도 의대 총 입학정원을 결정할 계획이다.
’의사 인력 확충’ 국민 지지 여론에 과연 부응할까
하지만 정부의 그간 행보를 보면 정책이 예정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 여전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추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필수의료 혁신전략 회의’를 주재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윤 대통령은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지역·필수의료가 붕괴되고 있다”며 “일단 의사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의료개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약 보름만에 정부는 필수의료 혁신전략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공식화했다.
현재 우리나라 임상의사 수는 인구 1천명당 2.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OECD 가입국 평균은 인구 1천명당 3.7명이다. 이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빅5 병원 상경 치료’ 등 지역의료 공백 문제가 시급한 사회 현안으로 대두된 근본 원인이다.
그러다보니 의사 인력 확충을 위해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도 충분히 형성돼 있다. 전국의료노동조합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서든포스트에 의뢰해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만 19세 이상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대부분인 82.7%가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에 찬성했다.
그런 만큼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여야간 이견이 있을 수 없었고, 진보와 보수를 떠나 시민사회에서도 환영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그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장 이날 발표된 수요 조사 결과를 두고도 정부는 갈지자 행보를 보여왔다. 보건복지부는 당초 13일에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로 해놓고 일정을 돌연 연기했고,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발표를 미루더니 이날 되어서야 가까스로 결과를 공개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그 이유에 대해 “40개 대학의 의대 증원 수요를 확인하고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이날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12월 말, 늦어도 내년 1월 초까지는 전체 의대 정원 규모를 교육부에 넘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의사단체 반발 넘을까
당장 의사들의 전방위적인 반발 기류가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동안 의대 정원을 증원하겠다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의협)을 중심으로 반대 움직임이 일었다. 새 의료현안협의체 협상단을 구성한 의협은 지난 15일 회의에서 2020년 의대 증원 추진 당시 전공의 진료중단(파업)을 언급하며 일방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 그보다 강경한 투쟁을 할 수 있다고 엄포했다. 경기도의사회 소속 의사 100여명은 같은 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의대 증원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다.
만약 이번 수요 조사 결과대로 증원을 하는 경우 당장 내년에 치러질 입시에서 의대 정원이 지금의 2배 가까이 늘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 의협은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과학적 근거와 충분한 소통 없이 의대 정원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경우 의료계 총파업도 불사할 것”이라고 엄포했다.
이전 문재인 정부도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다가 실패한 핵심적인 이유도 의사단체의 격렬한 반발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 7월 정원이 49명 규모인 공공의대를 신설하고, 의대 정원을 연간 400명씩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공공의료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의료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전공의·전임의들은 응급실과 중환자실마저 방치하는 집단휴진에 나서고, 의대생들은 국가고시를 거부했다. 특히 집단휴진은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벌어진 만큼 정부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었다. 정부가 정책을 졸속 추진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보건복지부와 의협은 ‘9·4 의정합의’로 사태를 일단락했다. 이 합의는 정부가 의대 증원, 공공의대 신설 등 4대 의료정책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가 안정화된 이후 의협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정부의 패배였다. 그로부터 3년 뒤, 새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가 이를 다시 추진하고 있다. 의협은 문재인 정부에서 맺은 ‘9·4 의정합의’를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제대로 된 협의도 없이 의대 증원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결단만 내리면 못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유행이 사실상 종료되고 정치적 환경도 바뀌면서 현재는 이전과 상황이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가 결단만 하면 추진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할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던 여준성 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이건 정책 추진력의 문제”라며 “문재인 정부 때에도 코로나19 유행만 아니면 의사들의 반발이 있어도 밀어붙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소통하고 협의하면서 정책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추진하려고 했던 반면, 윤석열 정부는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한다면 의대 증원도 가능할 것”이라며 “현재는 코로나19 같은 변수도 없고 의사들도 ‘검찰정권’이 무서워서 이전처럼 크게 반발하지 못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의사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데에 여러 이유가 거론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밥그릇 싸움’으로 해석되고 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달리 공공의대 신설이나 지역의사제 도입과 같은 제도는 함께 검토하고 있지 않아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의 실효성 논란도 일고 있다. 의사단체가 반대하는 이유가 줄어든 셈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보건의료위원장인 송기민 한양대 보건학과 교수는 “공공의대를 빼고 의대 정원만 늘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의대 정원 확대 자체는 환영하지만, 공공의료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윤석열 정부가 국민적 지지도가 높은 의대 정원 확대라는 정책 방향만 발표해두고 내년 총선 때까지 저울질하며 여론을 살피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온다. 윤석열 정부가 교육·노동과 함께 3대 개혁으로 내세운 연금개혁과 의대 증원 정책이 총선을 앞두고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하는 데 있어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지 특정 집단의 눈치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