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국영수가 아니라 진보를 조기교육하자

이 칼럼에서 몇 번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을 문제 푸는 기계로 만드는 그 따위 교육으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건지 나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

구한말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4대손이자 한국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던 피터 언더우드 박사와 과거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언더우드 박사가 나에게 들려줬던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답을 찾는 일(Find the Answer)에는 세계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일(Solve the Problem)에는 세계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1번부터 5번까지 보기를 주고 그 중 하나를 찾으라 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문제를 던져주고 해결하라고 하면 아예 못한다는 거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인식하고 연관된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며 다양한 실패의 경로를 거쳐 마침내 해법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이 복잡한 과정을 마주하면 당황부터 한다는 이야기다.

이건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5지선다 보기 중 답은 잘 찾는데 정작 사회에 던져놓으면 엄마 아빠가 도움 없이 아무 것도 못하는 경우마저 생긴다. 학부모가 성적 이의 제기를 위해 대학교 교수를 찾는 일도 있단다. 대학가에 치맛바람 걱정도 나온다. 이게 어찌 정상적인 교육인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교육

최후통첩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1982년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귀트(Werner Guth, 1944~)가 발표한 이후 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게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좀 길다. 최대한 간단히 이야기를 하자면 이 게임은 일종의 ‘돈 나눠주기’ 게임이다. A와 B 두 참가자 중 A에게 1만 원을 공짜로 지급한 뒤 그 1만 원을 둘로 쪼개 B와 나눠가지라고 제안하는 게 게임의 골자다.

B에게는 A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 받아들이면 A와 B는 그 돈을 약속대로 나눠 갖는다. 단, B가 A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 게임은 무효다. 즉 A와 B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아주 간단한 게임인데 이 게임에는 사실 인간의 오만 복잡한 심리가 다 담겨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단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면 이렇다. 첫째, 대부분의 실험에서 돈을 나눌 권리가 있는 A는 B에게 평균 약 4,500원의 돈을 나눠준다. 둘째, A가 2,000원 이하를 제안했을 때 B는 대부분 그 2,000원을 포기하고 너도 죽고 나도 죽자 전술, 즉 둘 다 한 푼도 못 받는 길을 택한다.

자, 지금부터가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연구다. 엘리자베스 호프먼(Elizabeth Hoffmann)이라는 학자는 이 최후통첩 게임에 약간의 변형을 줬다.

어떤 변형이냐? A와 B를 누가 맡느냐를 퀴즈를 통해 정한 것이다. 퀴즈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3+5는?” 수준의 문제다. 정답을 빨리 외친 승자가 돈을 나눠주는 A가 되고 패자는 그 돈을 받는 B를 맡는다.

진보당 청소년위원회와 청소년인권단체 활동가들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거는 교사인권 보장 반대 현재는 학생인권 반대한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사퇴와 청소년인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23.08.02 ⓒ민중의소리

단지 이렇게 역할 분담 방법을 바꿨을 뿐인데 A가 나눠주는 돈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다. 원래는 4,500원 정도를 나눠주는 게 정상인데 이 게임에서 A는 평균 2,000원 정도만 이웃과 나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보통 B는 A가 2,000원 이하를 제안했을 때 대부분 너도 죽고 나도 죽자 전술을 사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B는 2,000원이라는 굴욕적 제안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진짜 별것도 아닌 퀴즈지만 그렇게 승자와 패자를 나누면 승자는 “나는 더 먹을 자격이 있어!”라는 과시욕이 생기고, 패자는 “나는 주는 대로 받아야지 뭐”라는 열패감이 생긴다. 고작 “3+5는?”이라는 간단한 퀴즈에 몇 초 답을 빨리 말한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 교육제도가 이렇다. 국영수 중심의 수능이라는 시험제도는 인간의 총체성을 전혀 평가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간단한 시험의 결과가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인생을 바꾸는 것도 문제지만 그 바뀐 인생의 결과를 당사자들이 대부분 받아들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명문대를 입학한 사람들은 거들먹거린다. 고작 국영수 좀 잘한 게 뭐 큰 대수라고? 명문대 입학에 실패한 사람들은 열패감에 빠진다. 내가 못났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자책한다. 불평등은 이렇게 고착화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한 발 더 나아가보자. 이번에 소개할 게임은 존 머니건(John Murnighan)과 마이클 스콧 색슨(Michael Scott Saxon) 두 경제학자가 변형한 최후통첩게임이다. 두 학자는 유치원생을 대항으로 이 게임을 실시했다. 유치원생들은 아직 돈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돈 대신 M&M 초콜릿 10알을 준 뒤 얼마나 나눠주는지를 살폈다.

다시 상기하자면 원래 게임에서 A는 평균 45% 정도를 나눠주고, B는 20% 이하를 제안 받았을 때 대부분 그 제안을 거부했다. 유치원생들도 나눠주는 비율은 성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평균 40~50% 정도의 초콜릿을 상대에게 건넨 것이다.

문제는 A가 아니라 B의 행동에서 나타났다. A중에는 자기의 이익만 생각해 무려 9알의 초콜릿을 자기가 챙기고 딱 한 알만 B에게 나눈 경우도 있었다. 성인이라면 대부분의 B는 이를 거부한다.

하지만 유치원 아이들 중 무려 76%가 이 초콜릿 한 알이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상대가 무려 9알을 차지하고 나한테는 고작 한 알만 주는 불평등한 짓을 했는데도 말이다. 보복을 선택한 유치원생의 비율은 고작 24%뿐이었다.

이게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안다. 그래서 그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이런 투쟁의 의식은 절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이런 불평등에 저항할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한 알을 주면 그냥 그거라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의와 진보는 가르쳐야 느는 것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국영수가 아니라 진보를 가르쳐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깟 국영수 좀 잘했다고 거들먹거리는 세상, 그깟 국영수 좀 못했다고 그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세상, 이런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은 교육에서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상 40, 50대가 이토록 진보적인 시절은 단언컨대 지금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 40, 50대가 낳은 20대는 왜 보수화를 걱정하나? 역사상 20대의 보수화를 지금처럼 걱정했던 시절도 지금이 단언컨대 처음이다.

이유는 하나다. 우리 부모 세대가 교육 방향을 잘 못 잡았기 때문이다. 진보는 절대 타고나지 않는다. 그건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로 우리의 아이들을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아이들이 불의에 저항하는 의식을 갖추도록 충분히 교육하지도 않았다.

부정해도 소용없다. 그렇지 않다면 ‘40, 50대 진보 vs 10, 20대 보수’라는 지금의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는 국영수 대신 진보를 교육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진보는 없다. 이건 교육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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