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인간의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했던 화가 케테 콜비츠(Kathe Schmidt Kollwitz)의 판화 제목이다. 콜비츠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사실대로 그려내면서 전쟁과 죽음을 재촉하는 온갖 권력에 맞서 진실과 연민으로 쟁투를 벌였다. 콜비츠는 전쟁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희생’은 그 비통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그녀가 남긴 일기의 한 구절 “아기의 탯줄을 또 한 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낳았는데 이제는 죽으러 가는구나”와 겹치는 대목이다. 그러나 콜비츠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는 작품을 통해 죽음마저 포용하는 어머니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만인의 어머니로서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에 반대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감내하고 견뎌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최근 이정섭 차장검사의 처남댁으로 불렸던 강미정 씨의 인터뷰를 보면서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였다. 보통은 익명의 제보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친윤 실세 검사’를 상대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진실을 폭로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자녀들에게 이러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을 통해 그가 표현하는 진실과 동기에 공감하게 된다.
윤석열 정권 들어 검찰의 압수수색 청구 건수는 연간 39만 6671건으로 하루에 1,000건이 넘는다고 한다. 대통령이 표적을 지목하면 검찰은 하수인이 되어 전광석화처럼 실시하고 아직 소명되지도 않은 사실을 언론에 피의사실로 공표한다. 표적 이미지를 범죄화하고 다시 이를 여권에서 증폭시키면서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해오는 셈이다. 실제 이 과정에서 이재명 야당 대표는 376회 압수수색을 당했다. ‘건폭’으로 몰린 건설노조 조합원은 1,000여 명이 줄줄이 소환조사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범죄사실이 안 나오면 다른 범죄가 나올 때까지 별건 수사를 통해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남발하여 ‘여하튼’ 죄를 만들어내는 행태가 어쩌면 이렇게나 똑같을까. 자신들의 눈 밖에 나면 누구든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겁박통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강호는 고문 경찰 곽도원에게 고문 사실을 실토하라고 말하지만 곽도원은 송강호에게 오히려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냐며 호통을 친다. 송강호는 절규에 찬 목소리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주장하지만 곽도원은 송강호에게 “입 닥쳐! 이 빨갱이 새끼야!”라며 모든 주장을 짓뭉개버린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고문 경찰에게는 빨갱이의 말로 들렸을 테니 그런 말을 뱉었으리라.
친윤 실세 검사에 맞서 진실을 폭로한 제보자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 오욕과 치욕의 세상에 항거하는 용기가 귀하다
최근 검찰왕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압수수색과 패악질은 법에는 위아래가 있고, 법 위에 군림하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내용은 과시적이지만 현실적 규범과는 거리가 먼 법을 두고 헌법학자들은 ‘장식용 헌법’이라고 한다. 반대로 헌법 규범이 현실과 일치하는 헌법을 ‘규범적 헌법’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헌법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윤정권 1년 6개월 동안 경험하는 것은 처참하고 절망적인 상황뿐이다. 더 황당한 것은 모든 것을 헌법적 질서라고 강변하며 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꾸민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언론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이들이 ‘법대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항변하는 이들을 법치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몰고 있다. 검사 시절에는 살아 있는 권력으로 수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검사가 끝나면 뒤처리 권력으로 수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자정하고 정리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주역』 「계사전」에 ‘궁즉변 변즉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말이 있다. 아침에 뜬 해가 기울면 황혼이 되고 극에 이르면 바뀌듯 ‘모든 사물들의 이치는 극에 이르면 바뀌고 바뀌면 통하게 되며 통할 때 오래 간다’는 뜻이다. 자신의 존엄과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누구의 시혜나 누구와 친하다고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변하려고 노력하고 스스로가 씨알임을 깨칠 때 그 때와 시기는 분명해질 것이다.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이때,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생각과 신념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권력에 무력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진실인지 알릴 시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오욕과 치욕의 세상에 항거하는 용기를 보여준 콜비츠와 강미정 씨가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