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직거래’로 RE100 대응 나선 대기업들…실상은 ‘아직’

현대·SK·LG 등 PPA 체결, 여전히 재생에너지 비중 미미…전력 산업 민영화 우려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전경과 수출 선적 부두에 대기중인 수출차량 모습. 자료사진. ⓒ뉴시스

대기업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로부터 전력을 직접 사서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산업용 전기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태양광 에너지 경쟁력이 올라간 영향으로 풀이된다. 일부 대기업의 재생에너지 전환이 가시화하는 모양새이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아직 규모가 작다. 대기업이 한국전력을 거치지 않고 재생에너지를 구매하는 형태가 전력 산업 민영화의 일환이라며 민간보다 정부의 역할 강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는 최근 현대건설과 태양광 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PPA는 전력 수요 기업이 태양광 발전사업자와 직접 거래를 맺어 전력을 공급받는 형태다.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현대건설이 구축한 태양광 설비의 발전 전력이 현대차 울산 공장으로 공급된다.

현대차는 이번 업무협약에 대해 RE100 목표 달성을 위한 행보라고 설명했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고 선언하는 캠페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4월 RE100에 가입하면서 2045년까지 사용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로 했다.

RE100은 자발적인 캠페인이지만, 재생에너지 전환은 국제 규제로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탄소세다. 유럽연합(EU)은 10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해, 철강·시멘트·비료 등 품목을 수출하는 기업이 EU 당국에 탄소 배출량 자료를 보고하도록 했다. 오는 2026년부터는 탄소 배출에 대한 관세가 적용된다. 한국에서 지불한 탄소 배출 비용은 차감된다. 적용 업종도 확대될 전망이다. 탄소 배출이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법 제도와 맞물려 RE100도 일종의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RE100 가입 고객사가 협력사에도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완성차 기업인 현대차와 기아뿐 아니라 부품사인 현대모비스, 현대위아가 함께 RE100에 가입했다. 수주 산업에 속한 기업은 재생에너지 전환이 더뎌질수록 경쟁력을 잃게 된다.

주요 대기업이 RE100 달성 수단으로 PPA를 추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SK그룹에서는 SK텔레콤, SK실트론, SKC 등 9개 계열사가 SK E&S와 PPA를 위한 거래협정서를 지난 24일 체결했다. 앞서 LG이노텍도 지난 8월 SK E&S와 PPA를 맺어, 오는 12월부터 구미 사업장에서 재생에너지를 조달받는다. 지난해에는 아모레퍼시픽과 SK스페셜티가 SK E&S와 PPA를 맺었다.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국제 사회 압박과 함께, 한전의 산업용 전기 인상이 최근 한국 기업의 PPA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전은 지난 8일 산업용(을) 요금을 kWh당 10.6원 올리기로 했다. 산업용(을) 요금은 계약 전력이 300kW 이상인 경우에 적용돼 전력 사용량이 많은 대기업이 대상이 된다. 적용 대상은 4만 2천호로 전체 2만 4,866호의 0.2%에 불과하지만, 전력 사용량은 48.9%를 차지한다. 앞서 한전은 지난해 9월에도 전기요금을 인상하면서 산업용 요금을 추가로 올린 바 있다. 지난 2년간 산업용 요금은 40%가량 올랐다. 여전히 심야시간대의 산업용 요금이 주택용 요금보다 비싸 대기업 특혜 논란이 지속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기업이 공장을 돌릴 때 부담하는 전기요금이 늘었다.

산업용 요금이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태양광 에너지 사용에 따른 비용 부담이 줄었다. PPA에서 전력 거래 대금은 수요 기업과 발전사가 협상으로 정하게 된다. 한전의 요금 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수요 기업으로서는 한전의 산업용 요금이 비싸질수록 민간 영역에서 태양광 에너지를 사서 쓰는 게 유리해진다.

주요 기업의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는 아직 더디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가 이번 업무협약으로 확보한 현대건설의 태양광 에너지 설비 규모는 64MW다. 전국 평균 태양광 발전 시간인 3.6시간으로 적용하면 연간 8만 4천MWh다. 지난해 현대차의 전력 사용량은 337만 7천MWh에 달했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사용량은 28만MWh에 그쳤다. 신규 확보되는 태양광 에너지를 더해도 전체 전력 사용량에서 재생에너지의 비중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재생에너지 공급이 당장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SK그룹 9개 계열사가 SK E&S로부터 재생에너지를 조달받는 건 2026년부터다. 현대차와 현대건설 계약도 업무협약 단계로, 본계약 체결은 내년 2분기, 실제 이행 시점은 2025년 하반기로 예정돼 있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인상되면서 최근 PPA가 늘어나는 추세”라면서도 “이 정도 속도와 규모로는 한국 기업이 RE100에 적응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23일 현대차 울산 공장에서 현대건설과 태양광 재생에너지 PPA(전력구매계약)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왼쪽부터) 현대차 국내생산지원담당 김진택 전무와 현대건설 개발사업부 최재범 개발사업부 본부장(전무)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현대자동차

PPA 전용 요금제, 갈등 속 무기한 유예

PPA 활성화를 뒷받침할 제도 마련을 둘러싸고 이견이 나온다. 논의가 길어지면서 PPA 전용 요금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전은 PPA 전용 요금제 만들고 지난 6월 본격 도입하려고 했으나, 현재는 시행을 무기한 유예한 상태다. PPA 전용 요금은 PPA로 조달하는 재생에너지 외에 한전을 통해 공급받는 전력에 적용된다. PPA로 끌어다 쓰는 전력 규모와 관계없이, 일단 PPA를 맺은 기업은 해당 요금으로 한전의 전력을 써야 한다.

재계는 PPA 요금제가 산업용 요금보다 비싸게 책정됐다고 주장한다. PPA 요금제의 기본요금은 kW당 9,980원으로 산업용 요금보다 3,350원 비싸게 책정됐다. 전력수요가 적은 심야시간대의 경부하 요금은 PPA 요금제가 kWh당 0.2원 비싸고, 중간부하와 최대부하 요금은 각각 13.1원, 17원 저렴하다. 공장을 24시간 돌리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반발이 제기됐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는 PPA 요금제가 RE100 이행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PPA 요금제에 따르면, 전력 수요 기업에는 망 이용 요금도 부과된다. PPA에 따라 재생에너지를 끌어다 쓰더라도 전력망은 한전 설비를 사용하게 된다.

재계는 반발하지만, 경부하 요금 혜택이 심야시간 전력 사용량이 많은 일부 대기업에 집중돼 중간·최대부하 요금과 형평성을 맞춰야 할 필요성도 있다. 또한, 망 이용 요금도 한전 설비를 사용하는 데 따라 지급해야 하는 대가로, 불합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전력관리처 계통운영센터. ⓒ뉴시스

대기업 재생에너지 선점에 우려 목소리도

현 단계에서는 전력 수요 기업 입장에서의 PPA 경제성이 주요한 논의 대상이지만, 점차 태양광 에너지 가격은 내려갈 전망이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재생에너지 공급 확대를 위한 중장기 발전단가 전망 시스템 구축 및 운영 4차 중간보고서(2023)’를 인용해 태양광 kWh당 발전단가 올해 142원에서 2030년 98원으로 31%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2024년 예측치는 89원이다. 블룸버그 뉴에너지파이낸스(BNEF)는 한국에서 2027년경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화석에너지 발전단가와 같아질 것으로 관측했다.

태양광 발전 단가가 낮아지는 가운데 PPA를 중심으로 태양광 설비 투자가 이뤄지고 저렴한 재생에너지를 대기업이 가져가면, 가정과 자영업자, 중소기업은 가격도 비싼 재생에너지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를 써야 한다. PPA 자체에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PPA는 전력 수요 기업과 발전사업자가 한전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한다는 점에서 전력 판매 시장 민영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전력 산업 공공성이 훼손되면서, 민간 시장인 PPA 확산에 따라 일반 시민 부담이 가중되는 문제를 정부가 해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기획실장은 “PPA를 통한 재생에너지 거래 비중만큼 판매 시장이 개방되는 것”이라며 “개방된 시장에서 대기업이 재생에너지를 선점하는 체리피킹 효과가 발생하고, 한전은 조건이 좋지 않은 에너지만 가져가게 된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전환을 민간에 맡기지 않고, 국가가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게 구 실장 입장이다. PPA가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 증가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수단으로 평가되는 데 대해 구 실장은 “PPA가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한다는 건 주장에 불과하다”며 “정부가 정책적으로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공공기관, 협동조합, 지자체를 통해 직접 사업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며 “소규모 협동조합이 하기 힘든 대규모 사업은 지방 공기업이나 발전 공기업을 통해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PPA 등 민간 영역의 확대 정도와 별개로, 재생에너지 전환에 있어 가장 강조되는 건 정부의 의지다. 정부 의지가 명확히 드러나는 예산을 보면, 내년도 전력산업기반기금의 ‘재생에너지 지원’ 항목 예산은 6,054억원으로 올해보다 4,400억원, 42% 이상 쪼그라들었다. 신재생에너지 보급 지원 사업과 금융 지원 항목 등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정부는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을 기존 30.6%에서 21.6%로 하향하기도 했다.

석광훈 전문위원은 “재생에너지 예산 감축으로 태양광 설비 등에 대한 지원비가 줄어들어 에너지 전환이 더뎌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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