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위원장이 이끌던 국민의힘 당 혁신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사실상 빈손으로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출신 정치인을 등용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하다는 평가를 들었다는 그 혁신이 물거품이 될 조짐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사실 인 위원장이 혁신위를 맡을 때부터 이게 될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내가 비록 정치는 잘 모르지만, 경제학적 관점으로 봤을 때 혁신과 보수는 결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와 균형
시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주류경제학은 보수의 이념적 기반이다. 그런데 주류경제학의 핵심은 ‘균형(equilibrium)’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상반된 여러 힘이 서로 상쇄돼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균형 상황이 시작되면 시장 참여자들은 그 누구도 균형 상태에서 이탈하려 하지 않는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실제 내가 경제학을 배울 때 교수님의 설명이었다. 그 교수님은 두 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두 딸 모두 아이스크림 케이크(당시에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를 엄청 좋아했단다.
이것만 사가면 둘이서 하도 더 먹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이를 막기 위해 교수님이 제안을 했다. 먼저 언니에게 칼을 쥐어준 뒤 마음대로 케이크를 2등분할 권리를 줬다. 언니는 당연히 신이 난다!
하지만 이 권리에는 제약이 따른다. 언니에게 “너 마음대로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누는데 어느 조각을 먹을지 고르는 권한은 동생에게 있다.”는 것이 그 제약이다.
이러면 언니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케이크를 더 먹고 싶은 언니는 케이크를 이렇게도 쪼개보고 저렇게도 쪼개본다. 하지만 어떻게 쪼개도 손해다. 왜냐하면 더 크게 보이는 조각을 냉큼 동생이 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언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케이크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처럼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다.
언니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손해다. 동생도 절반으로 나눠진 케이크를 집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상반된 힘이 정확히 상쇄돼 그 누구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지점, 이게 바로 균형이다.
주류경제학의 수많은 이론들은 바로 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수요와 공급,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인 ‘가격’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 균형이 찾아진다. 이렇게 시장을 믿고 맡기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균형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게 주류경제학의 요지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 철학에 따르면 한 번 형성된 균형점은 사실상 영구불변의 원심력을 갖는다. 그 누구도 균형점에서 벗어나면 손해를 보는 것이 바로 균형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시장과 혁신이 공존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혁신을 이뤄내려면 기존 시장의 균형을 압도할만한 파괴적 힘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혁신 중 하나였던 2000년대 초반 386 정치인의 대거 등용은 김대중이라는 압도적 힘을 가진 지도자가 단행한 일종의 시장 균형 파괴 행위였다.
누가 정치를 창조적으로 파괴할 것인가?
주류경제학자들, 특히 재벌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자들이 물고 빠는 경제학자가 있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슘페터는 경제의 발전을 주도할 유일한 계층이 바로 기업가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기업가의 역할을 경제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의 보수가 슘페터를 물고 빠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슘페터는 오로지 기업가만이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혁신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거의 기업가에 대한 우상숭배 수준의 언급인데, 재벌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보수 경제학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슘페터의 주장 중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혁신은 ‘창조적 파괴’에 의한 것이라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사실 주류경제학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류경제학은 균형을 쫓는다. 한번 이뤄진 균형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슘페터의 혁신은 바로 이런 균형을 해체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런 혁신을 이뤄낼 힘이 오로지 기업가에게만 있다는 슘페터의 주장은 완전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신이란 기존 시장 균형을 창조적으로 파괴해야만 시작된다는 그의 주장에는 완전 동의한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런 파괴적 혁신은 균형을 맹목적으로 쫓는 주류경제학이나 보수 정치권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보수의 정치 혁신은 ‘동그란 세모’처럼 애초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진보는 어떤가? 역사적으로 진보는 새로운 길을 걸었을 때 세상을 바꿨다. 사바나의 연약한 잡식동물이었던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보수와 진보의 갈림길에서 진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 먹고사는 것에 만족해 지금의 거주 지역에 머무르면 안전은 보장된다. 그게 주류경제학이 말하는 균형이다. 하지만 보수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도 진보는 그 균형을 깨고 저 산 너머로, 혹은 저 바다 건너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떠났다. 이런 파괴적 행동들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보수의 혁신은 당연히 실패했다. 그렇다면 진보의 혁신은 어떤가? 우리 스스로에게 궁극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에게는 기존의 질서를 창조적으로 파괴할 용기가 있는가?
“오로지 기업가만이 창조적인 파괴를 할 수 있다”는 슘페터의 헛소리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입증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혁신을 이뤄낼 힘이 바로 우리 민중들의 손에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 출발점은 바로 균형처럼 보이는 이 정적인 정치 생태계를 파괴적으로 뒤흔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