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모를 쓰고 졸업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세 줄로 길게 앉아 있다. 먼저 졸업장을 받은 사람이 다음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또 다음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아직 그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열아홉 살 어린 신랑이었을 때 신부와 어머니와 아들을 돌보지 못해서 후회된다고 고백한 분이었지. 어린 신부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통에 나가 일을 하다 잠깐 눈 돌린 사이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들이 트럭에 치였다고, 큰 눈을 더 크게 올려 뜨며 먼 곳을 바라보던 분이야. 그가 다음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열네 살로 돌아가 검둥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던 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엄마가 어느 집에 팔아버린 개 검둥이가 두 번이나 집을 찾아왔지만 다시 돌려보내야 했던 그 시절, 엄마와 검둥이가 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사람. 다음은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고 모란꽃도 좋아한다는 분이야.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고등학교에도 갔을 거고, 그러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았을 거라며 울던 얼굴도. 아버지의 등에 업혀 뚝섬으로 고기 잡으러 가던 어린 날로 돌아가고 싶다며 웃던 얼굴도. 올해가 정년이라 더는 자활센터 인문강좌에 나올 수 없다고 아쉬워하던 얼굴도.
“누구에게 편지를 쓸 건가요?” “아들한테요. 꼭 할 말이 있었거든요.” “편지를 아들에게 줄 건가요?” “모르겠어요.”
아직은 전할 수 없을 것 같은 편지를 쓴 남자가 모란꽃을 좋아하는 남자에게 졸업장을 건넨다. 모란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얼굴 사이로 다른 얼굴들이 겹친다. 스무 살 무렵에 같이 공장에 다닌 은영 언니가 보고 싶다고, 연락이 끊어진 은영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읽어준 그녀. 초등학교 화장실 수십 군데를 청소하고 왔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던 그녀. 돈을 벌어서 몸이 아픈 누나 대신 가장이 되어야 했던 남동생을 도와주고 싶다는 그녀. '나는 노숙자입니다.'라고 쓴 그녀. 여성 노숙인 쉼터의 그녀들.
자활센터 ‘인문학 강좌’ 졸업식을 마친 얼마 뒤 춘천으로 갔다. 춘천시립복지원 지붕 위에 눈이 흩날렸다. 강의실 입구에서 누군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젊은 시절에 전기 기술자였다는 분은 돈을 벌어 전업사를 차리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짜장면집에서 일했던 남자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어째서죠? 배는 고프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가요? 목장에서 젖소를 키우고 싶어요. 왜 젖소인가요? 배고플 때 소젖을 먹을 수 있잖아요. 누군가는 채소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돈을 벌게 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전업사를 차리고 싶다는 남자가 창 쪽으로 눈짓을 했다. 창밖에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올해 처음 보는 눈이에요. 우리도 처음 봐요. 모두에게 첫눈이군요. 나이를 물어봐도 되나요? 우리는 차례로 나이를 말했다. 전업사도 차릴 수 있고 채소가게를 열 수도 있고 젖소를 키울 수도 있는 나이였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마음의 병이 생겼다는 그녀는 얌전하고 눈이 크고 총명해 보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엄마와 나를 두고 필리핀으로 돌아갔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다시 뵌 적이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밉지 않나요? 밉지 않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아버지를 보고 싶어요. 아버지를 만나면 뭘 하고 싶은가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녀가 눈물을 뚝 흘리며 속삭였다. 이름을 물어도 되나요? 울던 그녀가 이름을 말하고 수줍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바람보다 빨리 쓰러지고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들에 관해 쓴 어느 시인의 이름과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담고 살았어요?”
올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다는 저녁, 광화문 교보 생명 맞은 편 술집에서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최준영 대표에게 물었다. 최준영 대표는 내가 잠시 만나고 온 사람들을 20년째 찾아다닌 분이었다. 길고 외로웠을 그 시간에 첫눈처럼 온 위안, 그날 그가 받은 ‘교보교육대상’이라는 상조차 그의 마음에 폭설처럼 겹겹 쌓였을 이야기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획한 전국 12개 노숙인 시설 인문학 강의가 문화예술위원회 '우리 가치 인문 동행'에 선정되어 글쓰기 강사로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0회 이상 진행해야 하는 노숙인 강좌를 위해 최준영 대표는 작가, 철학자, 과학자, 인문학자, 문화예술인 등 40여 명의 강사진을 꾸리고 교육해 전국으로 보냈다. 그가 홀로 해온 일을 '우리'가 함께 했다. 지난 20여 년 그가 거리의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셈이었다. 길에서, 지하철 역사에서, 웅크리고 잠든 그들의 몸속 가난과 슬픔의 흔적. 바람보다 빨리 쓰러지고 바람보다 빨리 울어야 했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살아보고 싶은 그 몸의 꿈들을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이 아니었다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사람이다’
최근에 출간된 최준영 대표의 열 번째 저서인 낮은 곳의 인문학, ‘가난할 권리’ 첫 글의 제목이다. 성프란시스대학(최초 노숙인 인문학 과정)에서 만난 '김 씨'가 임종 직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던 사람은 '인문학 과정을 함께 한 동료들'이었다. 최준영 선생은 그를 위해 졸업생, 재학생 노숙인들을 불러모아 체육대회를 열었다. 죽음을 앞둔 김 씨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늘 쫓겨나기만 했던 한강 둔치, 그들이 있는 곳이었다. 최준영이 있어서 누구도 김 씨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며칠 후 김 씨의 부음이 들려왔다. 가족이 없는 거리의 사람들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관례를 깨고 최준영 선생이 상주 역할을 하며 하룻밤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장례식 비용은 마련되지 못했고, 문상객은 모두 한 끼 식사도 어려운 거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밥과 국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같이 울었다. 부의함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오천 원, 만 원짜리 지폐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꺼내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자기 몸, 아니 이 세상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돈이었을” 지폐들이 먼 길 떠나는 김 씨의 발아래 꽃잎처럼 놓였다.
“사람이다. 사람이다. 사람이다.”
최준영이 만난 사람들과 그의 책 ‘가난할 권리’는 그늘진 곳에 웅크린, 그러나 여전히 살아 바람보다 먼저 일어설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겨울, 술에 취해 잠시 지하철 역사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자신의 몸에 신문지 한 장이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뜨거웠다는 친구의 고백. 그날 시상식 하객의 절반을 채운 최준영의 친구인 ‘김 씨들’. 꼭 다시 만나자고 손을 맞잡았던 그녀들. 함께 첫눈을 보며 기뻐하던 그들. 살아있는 것들은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존재였다.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 2005년부터 노숙인, 미혼모, 재소자 등 이웃과 함께 삶의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핍의 힘’, ‘가난할 권리’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2023년 ‘교보교육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