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참으로 뼈아픈 역사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와 사회에 남긴 상처가 매우 크고 깊습니다. 아픈 역사일수록 우리는 배우고 기억하고 교훈 삼아야 합니다. 불의한 반란세력과 불의한 역사에 대한 분노가 불의한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길 기원합니다.” 진보 인사들이 영화라는 안전한 방패 뒤에서 독전대(督戰隊) 역할을 하는 것은 낯설지 않다. 영화를 보고 페이스북에 손가락을 놀리는 일에는 아무런 노고도, 희생도 없다.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2004년 가을, 『월간 중앙』에 난 「군은 청와대를 어떻게 보나」라는 기획 기사가 다시 소환됐다. 그 기사에서 현역 사단장 K소장은 “이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며, 쿠데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먼저, “휴대전화 때문에 보안 유지가 불가능하다. 특정 부대, 특정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둘째, “군사를 집결시키고 장비를 앞세워 중앙무대로 치고 들어오려고 해도 교통체증 때문에 이동이 어렵다. 중앙 당국의 통제가 없는 한 수도권 교통체증을 극복하기 어렵다.” 셋째,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병력과 장비를 중앙무대에 진출시켰다 해도, 과거처럼 몇 안 되는 신문사와 방송사를 접수하는 것으로 국민 동의를 구할 수 없으며, 국민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쿠데타군을 응징할 것이 분명하다.” 넷째, “더 이상 군이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도 명백한 앞의 4가지 사실을, 누구보다 군이 먼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는 더 이상 없다.” YTN은 저 기사를 발굴하면서 “그사이 한국 사회가 더 촘촘해지고 더 개방되어 무모한 쿠데타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이대건 기자)라고 덧붙였다.
구더기(휴대전화·교통체증·인터넷 등)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은 없다. 쿠데타가 영원히 불가능하려면 신병 훈련소와 3개 사관학교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사관학교에서는 헌법에 위배되며 군통수권자(대통령과 대통령에 준하는 대리자)의 명령을 받지 않은 어떤 거병도 불법이고 반역이라는 것을 교육시켜야 하고, 신병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에게는 상관의 쿠데타 음모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그랬다면 설혹 전두환 같은 반역자가 생기더라도 이등병이 쏜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쿠데타가 불가능한 이유가 다섯 가지나 되는 아이러니 ‘통진당 빨갱이’ 이후 ‘민주당 빨갱이’는 당연한 이치
정의가 실현되었다면, K소장이 쿠데타가 불가능한 이유를 다섯 가지씩이나 댈 필요가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1995년 12월, 내란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니 원칙대로 하면 그는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제15대 대통령 당선인인 김대중의 요청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전두환을 사면하고 말았다. 정아은이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사이드웨이,2023)에 쓴 것처럼, 그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에게서 비롯된 1980년대의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248쪽)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전두환은 사면으로 방면되자 그를 유죄로 선고했던 법원의 판결을 모두 뒤엎고, 스스로를 국난을 극복한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전두환의 추종자들은 이런 그를 ‘전탱크’라고 숭앙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전두환이 조국에 싸지르고 간 짓은 비루하다. 애초에는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던 그가 죽기 전에 쓴 회고록에서는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에 왔다”는 지만원의 주장에 찬동했다. 이로써 12·12나 5·18과 무관한 국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고, 대한민국에 남남갈등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가 군인이고자 했다면 “5·18 당시 북한군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는 데에 목숨을 걸었어야 했다.
대통령 사면권은 삼권분립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을 깔아뭉갠다. 왕정 시대의 유제인 대통령 사면권은 사라져야 한다. 물론 대통령 사면권은 미국에도 있다(미국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면의 혜택을 일상을 회복할 필요가 있는 일반인이 아닌 내란 수괴에게 선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범죄다.
2013년 9월, 통합진보당(통진당) 이석기 전 의원이 내란음모 및 내란선동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2014년 2월 1심 재판부는 내란음모·내란선동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지만(징역 12년 선고), 그해 8월 항소심 재판부는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보고. 내란선동죄만으로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전두환은 내란죄를 저지르고도 2년 만에 사면되었던 반면, 내란죄도 아니고 내란음모죄도 아니고 내란선동죄라는 하찮은 죄목으로 9년 형을 선고받은 이석기는 8년 3개월을 살고, 사면도 아닌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 사례는 대통령 사면권을 가진 국가가 시스템과 법치가 아닌 지도자 개인의 심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통진당 해체는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사법살인(인혁당+민청학련)이 오늘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박근혜 정부의 불의를 막아야 할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에 적극 협력했다. 통진당이 ‘빨갱이’가 되어야 자신들이 빨갱이 누명으로부터 벗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촛불의 힘으로 박근혜 정부가 탄핵되고 정권을 거저 주은 문재인과 이 정권의 중추인 임종석·이인영·우상호·조국 등의 386은 똑같은 이유로 이석기를 사면하지 않았다. 사면도 아닌 가석방은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채우면 자격이 주어지지만, 문 정부는 그조차도 묵살했다. 문재인과 386은 도덕적으로 파산했다. 그런데 무슨 ‘서울의 봄’ 타령인가. 민주당보다 더 빨갱이라던 통진당과 이석기가 제거되자, 이번에는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이 빨갱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터. 윤석열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문 전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지목했고, 국무총리 직속 경찰제도발전위원회 박인환 위원장은 “문재인이가 간첩이라는 것을 70% 이상의 국민이 모르고 있다”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너의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