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 산업혁명이 왜 영국(잉글랜드)에서 먼저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다른 시각에 대해 살펴본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혁신 경제학의 세 번째 주장은 시장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혁신성장에 유리하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독점기업과 같은 지배적인 생산자 없이 여러 고만고만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한 없이 참여해 대등하게 경쟁하는 시장 여건이 혁신에 유리하다는 주장이었던 셈이다. 그 기준으로 당시 영국과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영국이 좀 더 시장 경쟁에 호의적인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던 듯하다. ‘왜 영국이었나’에 대한 혁신 경제학의 세 번째 주장은 기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국가 간 경쟁이나 노동 숙련 차이는 왜 영국이었는지 설명력이 부족
그렇다면 혁신 경제학의 주장 외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추동한 다른 요인으로 제기된 가설은 없었나. 있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국가 간 경쟁’이 산업혁명을 초래했으리라는 아이디어다. 당시에도 이웃 나라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라라면 왕실 차원에서 혁신에 민감했을 법하고 그로 인해 성장이 더 자극됐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그 기준으로 보면 당시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던 중국에서 근대적 성장이 더뎠고, 본격적인 국가 간 경쟁 체제가 형성되었던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발발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도 같다. 다만 그런 설명은 ‘왜 중국이 아니었나’라는 질문에는 적합하지만 ‘왜 유럽 다른 나라가 아닌 영국이었나’라는 질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노동 숙련의 수준이 나라마다 달랐던 데에 주목할 수도 있겠다. 혹시 영국 노동자들이 네덜란드나 프랑스보다 전반적으로 숙련도가 높았던 것이 당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발한 요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이다. 하지만 그 가설은 그다지 설득력 없다. 당시 ‘문해율’(글자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을 비교해 보면 영국은 네덜란드보다 뒤처져 있었고 벨기에와 비슷했으며 프랑스보다는 살짝 앞선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 변화는 대개 장인의 고급 기술을 기계와 아동의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숙련공들은 기술 변화에 저항해 ‘러다이트 운동’(방직기가 도입될수록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섬유 기계를 파괴했던 1810년대 사회 운동)을 조직했다. 그렇다면 그들 숙련공을 산업혁명의 기반으로 볼 수는 없다.
금융의 역할도 과장할 일 아니다
왜 영국이었나 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으로는 혹시 다른 유럽보다 영국에서 금융이 더 발달했기에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난 게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산업혁명 초기에 은행 같은 금융기관의 역할이 컸으리라는 의견은 있다. 주류경제학의 슘페터 학파로 분류할 수도 있을 프랑스 경제학자 필립 아기온은 금융 기법의 발전이 ‘위험 투자’(투자 손실을 볼 수도 있는 위험을 감내하면서 단행하는 투자)를 활성화한 측면에 주목하면서 금융이 산업혁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반론과 유보 사항들이 존재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당장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금융에서 발생한 혁신들은 산업혁명보다 시기상 앞선 르네상스 시대에도 많았는데 금융이 그렇게 중요했다면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왜 산업혁명에 비견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걸까? 실제로는 금융은 산업혁명에서 부차적인 역할만 했던 게 아닐까.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대표했던 중간 계층 사업가들은 사업 밑천을 은행에서 꾸거나 증권을 발행해 마련하기보다는 사업가들 자신이 쌓아온 자체 자금에 주로 의지했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17세기에 영란은행(영국의 중앙은행)이 설립되어 스웨덴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보다 일찍 중앙은행으로 진화하긴 했지만, 보통의 대출 업무를 수행하는 상업은행들은 19세기 초까지도 오히려 영국이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덜 발달해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사적 대전환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정부 역량의 차이
마지막 가설은 ‘정부의 역량’이다. 영국 정부가 유럽의 다른 정부보다 유능했기에 산업혁명에 유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영국 의회는 부자들을 위한 재산권 보호 측면에서 프랑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적극적이었지만, 반면에 세금을 걷는 데에 있어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시민 1인당 세금을 2배 정도 더 걷었다. 정부의 규모나 역량을 비교하면 프랑스가 영국을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의회나 정부의 과세(세금을 부과하는 것) 능력이 취약했다. ‘짐이 곧 국가’라고 외치던 절대 왕정 시대였지만 사실 프랑스 왕은 세금 걷기가 어려웠다. 루이 16세가 세금을 부과해 왕실의 재정적인 위기를 타파하려고 1789년에 ‘삼부회’(최고 신분인 성직자, 두 번째 신분인 귀족, 세 번째 마지막 신분인 평민의 대표가 참여했던 신분제 의회)를 소집했더니, 그 결과가 인류 역사를 뒤흔든 프랑스 대혁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다 그렇게까지 됐을까. 그 이유를 따져보면 결국 성직자 신분이나 귀족 신분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신분인 신흥 자본가계급까지 가진 사람들이 정부 고위직을 몽땅 차지하면서 온갖 핑계로 면세 특권을 누리고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왕실 재정의 부담은 가난한 농민들한테 집중되었다. 프랑스 왕은 부자들도 세금을 내도록 제도를 개혁할 능력은 없었다. 그저 힘없고 천대받는 농민들만 더 수탈하려고 들었다. 그랬으니 성난 민중이 왕의 목을 단두대에서 잘라버린 것이었다.
무능했던 프랑스 왕의 결말은 민중의 단두대
부자 증세는 정부 역량의 문제였기에 그것은 또한 산업혁명과 같은 역사적 대전환을 그 나라가 주도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결정했다. 지금 한국도 그 시절 프랑스 왕처럼 부자 증세 못 하고 민중을 위한 제도 개혁에 실패한다면, 그래서 민생 파탄을 초래하는 무능한 모습만 노정한다면, 그 결과는 민중의 단두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보다 1인당 세금을 2배나 더 냈던 영국에서는 왜 왕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가지 않았을까. 그 한 가지 이유는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당시 성직자 신분이나 귀족 신분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개혁이 단행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그렇게 확보한 세입의 상당 부분을 군비 확충에 썼다. 제국주의 영국의 해군은 자국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제국주의야말로 영국 고임금 경제의 물질적 기초였다. 해외 식민지에서 가령 인도 노동자를 착취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으로 영국 자본가들은 자국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다만 영국에서도 의회가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했기에 세금 부담의 가장 큰 부분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에게 귀착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세수가 소비세(소비 지출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였기 때문에도 그랬다. 적어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가 의회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그와 같은 양상이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