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아의 새 음반 [리버사이드]는 전작 [청파소나타]와 비슷하게 들린다. 가령 ‘운다’는 ‘광장’과 흡사하게 느껴지고, ‘좋은아침 배드민턴 클럽’은 ‘서울역에서 출발’과 유사하게 다가온다. 한 예술가의 작품은 결국 자신의 스타일을 잇고 반복하기 때문일까. 정밀아가 같은 연주자들과 계속 음반을 만들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밀아가 이번 음반에서 큰 변화와 실험을 감행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흠이 되거나 음반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리버사이드]는 정밀아 자신의 어법을 유지하고 특징과 장점을 지켜감으로써 정밀아답게 만든 음반이다. 강아솔, 강태구, 김목인, 김사월, 선과영, 시와, 여유와설빈, 예람, 이민휘, 최고은, 황푸하를 비롯한 당대의 포크 싱어송라이터들 가운데 정밀아를 금세 골라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그가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정밀아의 노래는 그 중 가장 생활에 가까운 노래다. 숙련된 보컬리스트로서의 아우라가 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려한 기교를 뽐낸 적 없는 목소리는 예술의 거품을 걷어낸 생활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고백이나 이야기처럼 들리는 노래. 바로 거기서 정밀아 노래의 보편성과 구체성이 나온다. 정밀아는 그렇게 꾸밈이 적은 목소리, 담담한 목소리로 삶의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노래한다. 그 순간들은 기쁨의 순간이기도 하고 절망의 순간이기도 하다. 기쁨도 절망도 아닌 일상을 포착하는 경우도 많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정밀아의 목소리는 높이 떠오르거나 깊이 가라앉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드러내면서 담담하게 노래하는 정밀아의 노래는 그 차분함으로 믿음과 안정감을 준다. 어떨 때는 노래를 통해 타오르고 싶고, 어떨 때는 가라앉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데, 정밀아의 노래는 어느 한쪽에 국한되거나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정밀아의 노래는 때때로 슬퍼하거나 설레면서도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의 노래다. 이런 저런 일을 겪지 않은 게 아니고, 세상을 외면하며 마음을 닫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노랫말을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하면 안정되고 다정한 목소리의 태도에 기대고 싶어진다. 어렵지 않은 노랫말과 기복이 적은 목소리, 소박하면서도 따스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에는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치유하는 힘이 있다. 이것이 포크 음악만의 고유한 매력과 아름다움은 아니겠지만 이 같은 정밀아 음악의 특성과 매력이 오늘의 포크 음악을 특별하게 하는 이유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밀아 (JEONGMILLA) - 리버사이드 (RiverSide)
[리버사이드] 음반에서 밑줄을 긋게 하는 가사를 옮겨본다. “한 길 건너 집 옥상엔 호박덩굴 늘어져 / 뒤집힌 우산을 길옆으로 치우는 사람”(‘장마’), “한강 다리에 둘러쳐진 높은 철망 앞에서 / 구겨진 술잔 하나 바람에 굴러가고”(‘’리버사이드‘) 같은 노랫말은 일상을 구체적으로 옮긴 정밀아의 시선이 돋보인다. “나는 혼자인 듯 혼자 아닌 사람입니다”(’서술‘), “나는 또 밤을 관통해 / 내 할 일을 해야 하나니 / 조급한 마음을 밀어내고서 / 한 줄 노래를 쓰고 지우네”(’좋은아침 배드민턴 클럽‘) 같은 노랫말이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자기 고백이라면, “말들이 으름장처럼 굴다가 / 말들이 칼날이 되어 날아든다”(’구구‘)는 노랫말과 “무릎을 끌고 땅을 기었고 / 높은 곳으로 올라 올라갔고 / 소리를 쳤고 / 발버둥 쳤고 / 죽을힘을 다해 울고 울었네“(‘운다’)는 노랫말은 사람 사는 세상을 끈질기게 지켜보며 곱씹어 고민하지 않았다면 쓰지 못할 진술이다. ”지친 이에게 내어준 물 한 잔과 의자 낯선 이의 손등에 건네는 환영의 입맞춤 / 달빛에 자꾸 떠오르는 너의 얼굴 무던해도 넉넉히 두 눈 가득한 온기“(‘사랑은’)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정밀아의 음반이 정밀아의 목소리와 노랫말만으로 채워졌을 리 만무하다. [리버사이드] 음반은 포크음악의 전형 같은 통기타 사운드만 활용하지 않는다. 어쿠스틱 기타에 맞춰 노래하는 ‘장마’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연결하며 물기 가득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서술’에서 클래식 기타로 갈아탄 노래는 그 악기 하나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다 다시 풀밴드 편성으로 연주하는 타이틀곡 ‘리버사이드’에서 정밀아는 앰비언스 사운드와 공간감으로 노래의 울림을 부풀리면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정밀아가 음악을 잘 알고 있으며, 잘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좋은 음악은 의미 있는 노랫말과 빼어난 멜로디, 적합한 사운드의 결합으로 완성되는데 정밀아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이번 음반에서 정밀아가 자주 활용하는 앰비언스 사운드들은 노래의 현장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한편 예쁘게 노래하는 ‘그림’에서는 일렉트릭 피아노가 노래의 변화를 구성한다. 포크록의 전형 같은 ‘구구’는 소박한데, 이번 음반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곡 ‘운다’는 처절하지 않은 목소리와 앰비언스 사운드로 처절한 세상을 껴안아버린다. 정밀아의 휴머니티를 핍진하게 드러내는 곡은 죽음과 고통의 시대에 대한 음악가의 치열한 대답이다. 케이팝의 성취가 한국대중음악의 한 축이라면, 이 노래가 또 다른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운다’의 폭발 이후를 어루만지는 일은 ‘물결’의 일렉트릭 피아노와 첼로의 몫이다. ‘사랑은’에서는 다시 클래식 기타만으로 노래하는데, 한정된 악기를 조율하면서 연출해내는 프로듀서 정밀아의 역량은 당대 최고의 포크 싱어송라이터 중 한 사람으로 정밀아를 인정하게 하는 근거다.
‘좋은아침 배드민턴 클럽’이 비트의 편안함으로 온기를 전하는 곡이라면, 노래하지 않는 ‘한강엘러지’는 연주와 소리의 모음만으로 애도를 표현한다.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다른 이들의 삶과 세상을 응시하는 노래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2023년의 세계를 멀리서 조망하고 가까이서 겪어내면서 한 예술가가 진실하게 노래할 때 삶이 더욱 소중해지는 만큼 비극적인 세계에 대한 연민과 고통이 깊어진다. 함께 버티며 울어야 하는 시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