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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선거운동이 아니라 진보운동을 해야 할 때다

경제학에서는 가끔 사회의 복잡한 현상을 매우 단순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그 설명이 꽤 그럴싸해서, ‘어, 이대로만 하면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자유무역 이론을 지탱하는 절대우위설, 상대우위설 등이 그런 것이다. 이번 칼럼의 주제와 동떨어져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자기가 잘 하는 분야에 집중한 뒤 자유무역을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다”라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심지어 이 가설들은 매우 간단한 산수로 입증이 되는데, 숫자로 증명이 되다보니 과학적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선진국은 항상 고부가가치 산업의 일만 해야 하고, 후진국은 영원히 농업이나 어업 등 저부가가치 산업에만 매진해야 하고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겨야 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가?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 농업을 절대 사수하는 선진국도 적지 않다. 후진국이 영원히 농업이나 어업에만 매달리면 지구적인 착취의 구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경제학이 설명하는 것만큼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이야기다.

중위투표자 이론

투표도 경제학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분야다. 이 분야를 대표하는 경제학 이론이 ‘중위투표자 이론(median voter theorem)’이라는 것이다. 수학적으로도 매우 그럴싸하고 이해도 어렵지 않아 투표 때마다 널리 인용되는 이론이기도 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양당제의 경우 진보건 보수건 결국 투표 때 전부 중도층 지지자를 겨냥한 공약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에를 들어 유권자가 다섯 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다섯 명의 이념 성향은 ①극진보 ②진보 ③중도 ④보수 ⑤극보수 등으로 골고루 퍼져있다.

이때 진보와 보수 두 정당이 경합을 한다. 두 정당은 자기 당의 이념을 어디쯤에 놓는 것이 가장 유리할까? 정답은 ③중도에 두는 것이다.

만약 진보정당이 ②진보를 선택하고 보수정당이 ③중도를 선택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유권자는 자기와 이념이 가장 가까운 정당을 선택해 투표한다. 이러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다. 무조건 보수정당이 ③중도 ④보수 ⑤극보수 세 표를 얻어 이긴다. ②진보에 위치한 진보정당은 ①극진보 ②진보 두 표를 얻을 뿐이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1일 서울 구로구민회관에 마련된 구로제5동제4투표소에서 한 시민이 투표를 하고 있다. 2022.06.01 ⓒ민중의소리

다른 어떤 경우로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진보정당도 보수정당도 ③번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이러면 결과는 수학적으로 무승부지만(물론 실제 투표에서 무승부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승산이 있다.

이게 바로 대부분 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공약이 비슷해지는 이유다. 국민의힘 계열 보수 정당들이 대체로 꼴통짓을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중도층을 공략한다며 합리적인 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을 변화하는 힘

그렇다면 진보를 지향하는 우리는 늘 이런 중도 타령에 갇혀 진보를 포기해야 하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우리는 중위투표자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5명의 유권자를 ①극진보 ②진보 ③중도 ④보수 ⑤극보수로 분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진보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해법은 하나다. 5명 유권자의 분포 자체를 바꾸면 된다. 5명의 유권자가 ①극극진보 ②극진보 ③진보 ④중도 ⑤보수 이렇게 분포가 되면 된다는 이야기다.

정당들은 당연히 ③을 향할 텐데, 아까와 다른 점은 ③이 중도가 아니라 진보다. 국민들의 사상 지형이 바뀌면 비로소 투표를 통해 세상이 바뀐다. 이는 선거운동을 어떻게 깔끔하게 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평소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훌륭하게 진보운동을 잘 했느냐의 문제다.

또 한 가지, 경제학에서는 중위투표자 이론이 깨질 가능성으로 유권자와 투표자가 다를 때를 꼽는다. 유권자를 분석한 뒤 ③중도를 향해 열심히 공약을 내세웠는데 그 ③중도 유권자가 투표를 안 한다거나 진보나 진보 한 쪽에서 실제 유권자 비중보다 훨씬 높은 투표율을 나타내는 경우다.

이런 일이 실제 종종 벌어지는데, 이유는 투표가 경제학적으로 매우 귀찮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내가 들이는 비용보다 커야 그 길을 선택한다. 즉 투표를 하면 얻는 이익이 내가 투표를 위해 쓰는 시간과 비용보다 커야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투표로 얻는 이익은 매우 추상적이고 먼 일이며, 투표로 발생하는 귀찮음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의 일이다.

그런데도 투표를 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보다 많다. 이 이야기는, 투표가 이익과 손실을 엄정히 계산해서 실시하는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매우 도덕적인 행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의 영역에서 이 도덕적인 행위를 훨씬 활성화해야 한다. 똑같은 한 표라도 “귀찮으면 투표 안 해”라는 성향의 한 표와 “한 명이라도 더 설득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어야 해”라는 성향의 한 표는 무게가 다르다.

그리고 이것 역시 선거운동의 영역보다 진보운동의 영역에 가깝다. 선거가 임박해서야 지인들에게 지지 호소 문자를 돌리는 사람에게 갖는 신뢰도가 크겠나? 평소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며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선(善)이 되는 사람에게 갖는 신뢰도가 크겠나?

내년 4월 총선이 되면 어김없이 중도층을 향한 구애가 봇물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도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거운동이 아닌 진보운동을 해야 한다. “투표로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매우 옳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면 투표도 바뀐다!”는 그 역의 명제 역시 매우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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