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누가 자살했다! 좋지 않은 일이군! 부르주아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불행한 사랑이군! 여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병이 있었군! 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절망을 경험했군! 낙오자들을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그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이유가 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트 스트린버그
최근 유명 연예인이 자살했다. 이유를 알려고 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는 윤리적 잣대가 적어도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 사람을 기억하고 함께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다. 이 일로 인해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죽음의 현주소를 생각해본다. 연예인의 특성상 자살은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가까운 유족들과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여간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기획수사라는 혐의로 권력의 압력과 언론의 탄압마저 있었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왜 자살했는지?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죽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언론 탓만 할 수도 없다. 다만, 이 정권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반복 재연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관악구 반지하 참사,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사회적 재난과 참사가 끊임없이 발생해도 윤 정권은 실정법만 운운할 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연민과 수용의 태도도 없다.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살해하겠다고 공언하고 ‘묻지 마’ 살인과 폭행을 저질러도 공권력은 무력하기만 하다. 권력 스캔들에 대한 진상 조사나 책임 요구에 관련 당국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은닉하려 들 뿐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청춘들은 좌절하고, 중장년들은 권력의 시퍼런 서슬을 피하기 위해 한층 움츠러들며, 노년들은 무력함에 빠져 있다. 세대를 불문하고 이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인지 되묻게 된다. 사정기관을 앞세워 문제를 제기하면 가두고 제거할 뿐, 타락하고 무력한 사회에서 권력이 영원하기라도 할 듯 칼춤을 추는 망나니와 같은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 이르기까지 부역했다는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집단지성을 믿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권력 앞에 희생자가 되고자 나서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써 침묵하거나 오히려 죽을 듯이 싸우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저 이렇게 만들고 있는 권력과 그에 동조 기생하는 언론들이 만들어놓은 덫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길이 쉽고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사회에 이르기까지 나 자신도 부역했다는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집단지성을 믿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총선을 앞두고 이것이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자신만이 대안이라며 소위 ‘약’을 파는 약장수들을 등장하고 있다. 자신만이 해결책이라며 모든 것을 일거에 제거하겠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참사 현장에 꽃 한 송이 바치면서 희생자들을 위해 애도의 눈물을 흘렸는가? 살아남은 생존자, 유가족에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는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발자취가 진정 어떠했는지 스스로 돌아보길 권한다.
인간은 타인과의 접촉 욕구를 갈망하는 존재이며 ‘빈번한 상호작용과 지속적인 돌봄’을 유지할 때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며 자존감이 길러진다. 타인과의 연결감을 통해 고립감이나 소외감에 대처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현상 뒤에는 죽은 사람, 남겨진 사람, 그것을 직접 목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새롭게 펼쳐진다.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새로운 관계의 장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하며 끊임없이 변한다. 삶과 죽음 또한 상반되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는다는 것이 보다 솔직한 말일 것이다. 생명은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속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형태가 변하는 것이다. 뇌가 정지한다고 심장이 멈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라는 형태, 혹은 육신이라는 형태가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것뿐이다. 오늘도 힘겨운 자기부정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는 이들에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교훈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해 보살펴주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