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서로를 지키는 음악- 밴드 할로우 잰 20주년 기념 콘서트

밴드 할로우 잰 20주년 기념 콘서트 ⓒiamsonstar

누구에게나 오래 좋아하는 음악인이 있다. 사람들은 대개 10대 중후반에 즐겨들었던 음악을 평생 반복한다. 나에게는 들국화와 이문세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계속 음악을 찾아듣는 이들은 더 많은 이름을 추가한다. 20대, 30대, 40대, 50대에도 좋아하는 음악인 리스트를 늘려가는 일이 음악팬들의 기쁨이다.

하지만 가끔 그 이름을 지워야 할 일이 생긴다. 활동을 중단하기 때문이다. 평생 음악을 할 것 같았던 이들이 음악을 멈추고 다른 방식의 삶을 이어갈 때면 응원을 보내면서도 아쉽고 서운하다. 좀 더 응원하지 못한 탓인가 싶다. 지켜주지 못해서인가 싶다. 계속 활동하는 이들이 애틋해지는 이유다. 최정상급 음악인이 아닌 비주류 음악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음악도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생계가 되지 못하는 일을 지속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아는 나이가 되면 음악을 떠나지 않은 이들이 고맙다 못해 존경스러울 정도다.

며칠 전 오래 좋아했고 활동을 멈추지 않은 밴드가 2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2005년에 발표한 EP [Hyacinthus Orientalis Of Purple]로 처음 만난 할로우 잰이다. 할로우 잰은 이듬해 발표한 정규 음반 [Rough Draft in Progress]로 가장 좋아하는 밴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음반이 나왔던 겨울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들었고, 번번이 감동으로 떨었다. 이 음반을 발표한 후 지금은 사라진 공연장 쌤에서 처음 라이브 콘서트를 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겨우 서른 명쯤이었던 관객 앞에서 할로우 잰은 통곡하듯 노래하고 쓰러질 듯 연주했다. 그 후 라이브 클럽과 음악 페스티벌에서 계속 할로우 잰의 공연을 보았다. 모든 공연을 놓치지 않고 보진 않았으니 열혈 팬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 그래도 지산밸리록 페스티벌에서 할로우 잰의 ‘Empty’에 맞춰 슬램을 했던 순간의 짜릿함은 생생하다.

밴드 할로우 잰 20주년 기념 콘서트 ⓒiamsonstar

사실 할로우 잰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포스트 록, 스크리모 밴드가 안정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인디 음악인들 가운데 1세대 펑크 밴드 다수가 활동을 중단했듯, 시간이 흐르며 모던 록 밴드와 하드코어/메탈 밴드 중에도 활동을 중단한 이들이 늘어났다. 할로우 잰 또한 활동을 중단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받고,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장에 뽑힌 음반을 낸 밴드가 활동을 중단할지 몰라 걱정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지만, 그게 한국의 현실이었다. 할로우 잰의 2집 [Day Off]는 8년 뒤인 2014년에야 나왔다.

다행히 할로우 잰은 2016년에는 [Scattered by the breeze]를, 2023년에는 [다떠위다(Confusion)]를 내놓으며 듬성듬성 활동을 이어갔다. 케이팝 아이돌 음악인들과 비교하면 너무 드문 활동이었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감사했다. 그 시간동안 할로우 잰은 멤버를 바꾸고 새로운 시도를 더해가며 밴드의 궤적을 이어갔다. 충만한 슬픔과 분노를 터트리는 할로우 잰 음악의 정수는 한결 같았다. 때로는 그 음악을 듣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세상에는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다. 음악을 들으며 울고 무너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건들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0주년 공연이 열린 공연장 벨로주에는 관객들이 그득했다. 무대에 오른 멤버들 중에는 바뀐 멤버와 처음부터 자리를 지킨 멤버들이 섞여 있었다. 보컬 임환택의 소년 같은 얼굴은 여전했다. 그동안 발표한 곡들을 섞어가며 연주하는 동안 그 곡들을 들었던 순간들이 겹쳐졌다. 연주를 잘하거나 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팬은 예술가의 변화를 가장 섬세하게 알아차리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변화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공연의 분위기는 음악과 달리 편안했다. 격렬한 노래를 한 뒤 멘트를 이어가는 보컬 임환택은 자주 웃었고, 라디오헤드의 ‘Creep’를 잠시 카피할 정도로 유쾌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할로우 잰의 음악은 여전히 무겁고 장엄하며 격정적이었다. 비정한 세계, 피할 수 없는 운명, 무력한 자신을 노래한 곡들은 순순히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음악이 흐르는 동안 가슴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 했다. 더 뜨거웠던 날들과 여전히 뜨거운 마음을 확인시키는 노래의 연속이었다.

밴드 할로우 잰 20주년 기념 콘서트 ⓒiamsonstar

공연의 말미에 할로우 잰의 대표곡 ‘Blaze the Trail’을 다함께 따라 부를 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주먹 쥔 양 팔을 치켜들고 “희망을 잃고 쓰러져가도 언젠가 다시 되돌아온다. 똑같은 삶, 똑같은 꿈, 언젠가 다시 되돌아온다.”는 후렴구를 따라 부를 때는 이 노래를 18년동안 듣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마지막으로 ‘Empty’를 부르며 슬램하는 이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래를 아는 이들이 적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노래를 듣고 부르고 느낄 수 있으면 충분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순간이었다.

음악팬들의 기억 속에는 저마다 지울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벼락 같은 만남이 채워준 환희가 음악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삶을 즐겁게 하고 영혼을 살아있게 한다. 때때로 삶은 음악의 힘으로 버티고, 음악인들은 팬들의 환호로 견딘다. 우리는 서로를 지킨다.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