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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김건희와 마리 앙투아네트, 역겨운 최상위 계급자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주말을 맞아 빈둥거리다가 문득 ‘어떤 동물의 피부가 가장 두꺼울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갑각류 같은 동물 빼고 포유류로 후보를 좁힌 뒤 검색을 했더니 혹자는 피부 두께가 10cm에 이르는 북극곰이라고 하고, 혹자는 갑옷 같은 피부를 가진 아르마딜로라고 한다.

그런데 얼굴 피부 두께만 놓고 본다면 나는 윤석열-김건희 이 대통령 부부(이하 존칭 생략)가 단연 톱 순위에 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낯짝이 두껍다’ ‘얼굴이 두껍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영부인이라는 자가 명품가방을 뇌물로 받았는데, 이 부부는 불법촬영이니 함정취재니 하며 뻔뻔스럽게 버틴다. 외신도 “K-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며 이 사건을 보도하는데 이 부부는 당최 창피한 줄을 모른다. 버티는 태도가 어찌나 당당하던지 나는 하마터면 “어이쿠, 영부인이면 명품가방 받는 게 민생을 살피는 일입죠”라고 공손히 아부까지 할 뻔 했다.

명품, 그 잔인한 자본주의 계급의 상징

사람들이 왜 명품을 구매하는가? 이에 대한 다양한 경제학적 분석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그것이 사용자를 특별한 계급으로 포장시켜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 때만 해도 귀족들은 장신구로 자신의 계급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귀족은 귀족끼리 놀았고 평민은 평민끼리 모였다. 구분이 워낙 명확해서 유니폼을 입힐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다르다. 서울 홍대 앞이나 강남역 근처를 가보라. 거기 섞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서는 저 사람이 귀족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사회에 계급이 안 존재하느냐? 그럴 리가 없다. 이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1인1표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가 작동되지만 경제적으로는 1원1표를 바탕으로 권력이 분배되는 자본주의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는 당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문제는 중세 때와 달리 자본주의의 귀족이라 할 만한 지배계급에게 평상시 자신을 드러낼 수단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명품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경제학에서 명품을 지위재(Positional goods)라는 독특한 재화로 분류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명품은 기능이 뛰어나서 명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계급(Position)을 드러내기 때문에 명품이라는 이야기다. “비싼 외제차를 사는 이유는 승차감 때문이 아니라 하차감 때문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소비재로서의 명품이 지배계급의 상징이라면 생산품으로서의 명품은 착취의 산물이다.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인근의 사바르 지역에서 지상 9층짜리 빌딩인 라나 플라자(Rana Plaza)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다. 이 사고로 무려 1,134명이 목숨을 잃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사망자 502명)를 뛰어넘는 최악의 건물 붕괴 사고였다.

문제는 9층짜리 건물의 대부분 층에서 의류 제조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는 중국 및 인도와 함께 의류산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민중들은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한 달에 4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다.

붕괴 하루 전에 건물에 심한 균열이 감지되면서 경찰이 입주민들의 대피를 권고했지만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던 의류 공장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작업을 강행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옷가지들은 실과 천으로 짠 것이 아니라 방글라데시 민중들의 피로 짠 것들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 받는 장면 ⓒ서울의소리 유튜브 화면 캡쳐

그렇다면 그렇게 민중들을 착취한 이들이 누구일까?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조르지오 아르마니, 랄프 로렌, 휴고 보스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방글라데시에 외주 형식으로 제작을 맡겼다.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지위를 포장하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목숨을 잃는 현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 명품이 상징하는 자본주의의 극명한 모습이다.

앙투아네트와 김건희

이제 김건희와 종종 비교되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 이야기를 해보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의 배우자이자 대혁명 이후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인물이기도 하다.

앙투아네트 이야기가 나오자 김건희가 엄청 분노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혁명 이후 처형을 당한 그의 이야기가 김건희에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사람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둘 다 그 시절 지배계급의 최정점에 있었고, 둘 다 사치와 낭비벽으로 민중들로부터 엄청나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이 부분에서 앙투아네트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앙투아네트가 특별히 사치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연구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이 왕정의 꼭대기에 있던 앙투아네트를 사치와 낭비의 상징으로 생각했다는 게 중요하다. 프랑스 민중들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유, 평등, 연대의 깃발을 들었고, 성공한 대혁명은 중세 봉건주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주춧돌이 됐다.

김건희는 어떤가? 나는 도대체 그가 왜 이렇게 뉴스의 중심에 서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가 선출된 권력인가? 그는 단지 선출된 권력의 가족일 뿐이다. 그런데도 외신에서 명품 가방 이야기가 거론될 정도로 그가 국제적 유명세(라고 쓰고 망신이라고 읽음)를 갖는 이유가 뭔가? 그가 바로 중세 봉건사회 권력의 최정점에 선 앙투아네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박사학위 논문은 표절했고, 주가 조작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놈의 무속 논란은 끊이지 않고, 양평 고속도로는 엉뚱한 곳으로 설계됐다. 이 와중에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명품 가방을 “어휴, 자꾸 이런 걸···, 이제 정말 하지 마세요”라며 태연히 받는다. 이걸 보고 앙투아네트가 안 떠오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왕비의 권력은 그 시대 피지배계급의 땀과 피눈물 위에 쌓은 탑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민중들의 땀과 피눈물을 위로해주기 위해 부여된 권력이다.

그런데 멀쩡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도 아니고 대통령 배우자가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상징이자 민중 착취의 산물이기도 한 명품 가방을 태연히 뇌물로 받아 챙긴다. 이게 정상이냐? 그래서 나는 동영상에 찍힌 김건희의 그 태연한(그리고 즐거운) 표정이 실로 역겨웠다.

우리는 이런 후진 사회에서 살려고 촛불을 든 게 아니다. 우리의 선배 열사들이 이 꼴을 보려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니다. 이 사회를 바꿔야 할 무거운 책무가 우리 어깨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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