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양승태 무죄 판결이 남긴 교훈

무려 5년 가까이 이어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1심 재판이 전부 무죄 판결로 마무리됐다. 여권에서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고 문재인 정부 때 대대적인 검찰 수사가 진행됐었다는 점을 이유로, 야권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이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는 점을 이유로 각각의 책임론을 부각하며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듯하다. 그러나 사법농단 사건의 경우 그 자체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으며, 진상규명의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법부 판단이 수사 방향과 다르게 나왔다는 이유로 무작정 수사의 적절성을 비판하기엔 한계가 있다.

사법농단 사건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관철하고자 했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법원행정처를 앞세워 행정부와 입법부 등을 상대로 로비를 하고, 로비 수단으로 각종 중요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다. 이 중엔 박근혜 정부의 한일관계 복원 기조에 맞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최종 판결을 지연시키는 데 관여한 혐의도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통합진보당 지방의원·국회의원 지위확인 소송 등도 재판거래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대한민국 사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형 사건이었지만, 대중들은 이 사건의 실체에 온전하게 다가갈 수 없었다. 사법부가 처음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부터 검찰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시종일관 사안을 축소하고 영장 발부권을 이용해 증거 수집을 틀어막는 등 진상규명 절차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진상을 규명하라는 국민 여론에 힘입어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부적절하긴 했으나, 뚜렷한 범죄 혐의가 되지 않는다”는 석연찮은 최종 보고서를 남겼다. 1년가량 이어진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이 90%에 달할 정도로 사법부의 철옹성은 단단했다. 심지어 대법원이 자체 조사 문건조차 내놓지 않음에 따라 검찰은 초기 수사 때부터 애를 먹었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 구성원들은 핵심 증거인 조사 문건을 공개하냐 마냐를 놓고 회의를 하는 등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으며, 고법 부장판사 등 법관 고위직들은 “재판거래는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입장을 잇달아 내면서 조직 보호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비상식적인 과정을 거쳐 기소가 이뤄졌기에 애초에 충분한 물적 증거를 토대로 제대로 된 심리 절차를 밟기 어려운 여건에서 1심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 과정을 통해 사건의 실체에 온전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현실이었던 셈이다. 재판 자체가 편향적으로 진행됐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재판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법관의 ‘직권’ 범위를 자의적으로 협소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남용할 직권’이 없으며, 설사 ‘직권’이 있더라도 개별 재판부의 독립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논리를 펴면서 동료 법관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따라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돌아봐야 할 것은 과연 대한민국이 사법농단 사건과 같은 고위 법관들의 권력형 비위 사건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법원의 자체 조사부터 검찰 수사,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건 사건 당사자이자 수사 대상인 사법부가 오히려 주도권을 쥔 채 사건의 실체 규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했다는 모순이다. 사법부의 이러한 행태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법관 비위 사건의 경우 수사 단계에서부터 영장을 독립적으로 처리해 원활한 수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특별재판부 설치 방안 등이 거론됐으나 법조 기득권 세력들의 위헌 주장 등에 밀려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런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문재인 책임이냐, 윤석열 책임이냐’를 운운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 법관들이 연루된 사건은 일반 사건과 다르게 처리되는 것일까’, ‘사법부가 다른 권력과 마찬가지로 민주적 통제를 받도록 할 방법은 무엇일까’ 등이 시민들과 정치권이 던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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