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광주항쟁 때 유치원생이었는데 왜 미안하냐?”는 한동훈의 저질 역사관

요즘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하 존칭 생략)이 연일 운동권 청산론을 떠들고 다닌단다. 나는 이것을 매우 비열한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프레임에 말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쟁 중 유난히 눈길을 끈 대목이 있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의 논쟁에서 한동훈이 “그분들에 대해 임종석 의원께서 동시대에 있던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전 92학번이다. 1980년 광주항쟁 때 유치원 다녔다. 누구한테 미안해해야 하나”라고 언급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뭐 이런 개떡 같은 역사관이 다 있냐? 1980년에 유치원생이었으면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돌아가신 열사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없어도 되냐? 왜, 아예 “1919년에는 우리 부모님도 안 태어나셨을 때인데 내가 왜 유관순 열사에게 마음의 빚을 져야 하냐?”고 주장해보지?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아직도 광주 민주화 항쟁의 슬픈 역사가 수많은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판에 한동훈은 이 말을 이렇게 싸가지 없게 하는 게 능력인 줄 아는 모양이다.

충직의 딜레마


윤리학에는 충직의 딜레마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느냐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친일파의 책임을 그 후손 어디까지 물려야 하나? 친일파의 재산으로 호의호식 했으니 그들에게도 응당한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아니, 우리 할아버지가 친일 했을 때 나는 응애~도 한 적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책임을 어디까지 물려야 하나? 지금 일본인들은 일제의 침략 전쟁 때 아예 존재도 안 했다. 그러니 그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침략전쟁에 대해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았고, 아직도 그 침략전쟁의 여파로 고통을 받는 수많은 우리 민중들과 그 후손들이 있다. 과연 그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에 이 논쟁의 이름이 충직의 ‘딜레마’인 것이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이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덧붙이면 이렇다.

나는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수혜를 누가 입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일본 제국주의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제국주의적 침탈로 인해 수혜를 입었느냐? 만약 입었다면 당연히 사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과거 유럽 백인들이 벌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학살에 대해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느냐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이 나라 총리를 지낸 존 하워드(John Howard)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왜 사죄해야 하나?”라며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경기 김포시 라베니체광장에서 김포검단시민연대 주최로 열린 '김포-서울 통합 GTX-D 노선안 환영 시민대회'에 참석해 전달받은 김포-서울 통합 염원 메시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24.02.03. ⓒ뉴시스

하지만 나는 하워드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워드는 백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러면 묻자. 유럽의 백인들이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지니(Aborigine)를 학살하지 않았다면 하워드 가문이 그 대륙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하워드 당신이 총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웃기는 이야기다. 참고로 18세기 100만 명에 가까웠던 애버리지니 인구는 유럽인들의 대학살 이후 10만 명 선으로 줄었다.

그래서 “나는 92학번인데 광주 민주화 항쟁에 왜 마음의 빚을 져야 하냐?”는 멍멍이소리가 실로 가당치 않다. 한동훈은 그 민주화 과정의 수혜자가 아닌가? 만약 지금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일당들이 집권하고 있었으면 너님이 편하게 검사질을 할 수 있었겠나? 뭐라고? “그러면 나는 더욱 편하게 검사질 잘 하며 더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었겠죠”라고? 어이쿠, 왜 안 그러셨겠어요? 아무렴입쇼!

평온하지도 않았다

더 웃긴 사실이 있다. 한동훈이 스스로 자신을 92학번이라고 밝혔는데, 그 시절이 평온한 시절도 아니었다는 거다.

한동훈이 대학에 입학했던 1992년으로부터 불과 2년 전 노태우는 보수대연합이라는 명목 아래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그해 가을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민주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였다.

이듬해인 1991년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김귀정 열사가 시위 도중 세상을 떠났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열사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가을 한국원 열사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게 한동훈이 고3때 벌어진 일이다. 이 시기가 평온했던 시기로 보이는가? 그럼 한동훈 너님의 눈(깔)이 삐꾸인 거다.

나는 운동권에 대한 숭배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과거 운동권이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웃기다고 생각한다. 또 역사가 흐르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운동권일 필요도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고, 우리 민중들은 그 각자의 삶 속에서 모두 역사의 진보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일이 나랑 뭔 상관이냐?”라고 싸가지 없이 말하는 것은 아예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일이지만 나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그게 역사가 흐르는 방식이고, 그게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관이다.

아무튼 여당 대표라는 사람의 유치찬란한 역사관 잘 들었다. 한동훈 너님은 유치원 때 일이니 마음의 빚 땡전 한 푼 갖지 말고 광주와 상관없이 잘 살아라.

그런데 그거 하나만은 알아둬라. 네가 어릴 때 일이어서 1원 한 푼어치도 마음의 빚이 없다는 그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말이다.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무려 8명이 숨졌다. 그 중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가량의 신원미상 남자 어린이였다. 그 어린이는 목에 관통상을 입고 숨졌다. 이래도 너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인가? 어이쿠 그러시겠지. 아무렴입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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