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설을 맞아 명절 시리즈로 ‘세계 최악의 기업들’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현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 세계 민중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친 악랄한 기업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될 예정입니다. 이번 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네 개의 기업이 소개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최악의 분식회계, 미국을 뒤흔들다 _ 엔론 ② 누가 그 많은 아프리카의 아기들을 죽였나? _ 네슬레 ③ 콜럼바인의 고교생들은 어떻게 총기를 난사할 수 있었나? _ 미국총기협회 ④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그들의 책임이었다 _ 도쿄전력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박새로이(배우 박서준)가 ‘단밤’이라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는데, 장사가 너무 잘 돼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이때 박새로이에게 재무 상담을 해주는 펀드매니저 친구가 “너, 내년에 세금 준비 좀 해야겠다.”고 말한다. 장사가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었으니 내야 할 세금이 크게 늘었다는 이야기다.
박새로이가 “얼마나 나오려나?”라고 걱정하자 친구는 “걱정할 거 없어. 내 전문분야니까.”라고 답을 한다. 다음 장면에서 박새로이가 단밤 직원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 첫줄 내용이 “법인사업자를 낼 거야.”였다.
직원 중 하나가 “법인사업자가 뭔데요?”라고 물으니, 그 회사에서 제일 똑똑한 조이서(배우 김다미)가 “지금 버는 돈이면 세금 때문에라도 법인을 내긴 내야죠.”라고 답을 한다. 폭증한 세금을 줄이자며 펀드매니저가 내놓은 비법은 바로 법인사업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우리나라에서 장사를 하는 대부분의 상인들은 ‘개인사업자’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한다. 개인사업자란 말 그대로 개인이 홀로 사업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장사가 잘 돼 돈을 잔뜩 벌면 그 돈은 모두 사장님 몫이고, 장사가 안 돼 쫄딱 망해도 사장님 홀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개인사업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개인사업자가 돈을 벌었을 때 세금을 다른 일반인들과 똑같이 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개인이 번 돈에 대해 소득세라는 세금을 매기는데 돈을 많이 벌수록 세율이 높아진다. 1년 소득이 5억 원을 넘기면 소득의 42%를, 10억 원을 넘기면 45%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인사업자는 무엇이 다를까? 법인사업자란 개인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투자를 해 설립한 회사를 말한다. 대표적인 형태가 주식회사다. 주식회사는 여러 주주(株主)들이 공동으로 돈을 내 회사를 만든 것이다. 책임도 주주들이 공동으로 지고, 수익도 주주들이 공동으로 나눠 갖는다. 물론 투자한 돈에 비례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법인사업자는 개인과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개인사업자는 소득세를 내는 반면, 법인사업자는 법인세라는 것을 낸다. 문제는 법인세율이 소득세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데 있다.
법인의 수익이 2억 원 이하면 세율은 고작 10%만 적용받는다. 2억 원에서 200억 원까지 벌어도 20%, 200억 원에서 3,000억 원까지는 22%, 3,000억 원을 넘어도 적용되는 세율은 25%에 불과하다.
박새로이가 법인사업자를 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포장마차 사업으로 1년에 10억 원 넘는 돈을 벌었을 경우 그가 개인사업자로 남아있었다면 45%의 높은 소득세율을 적용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법인사업자가 되면 20%의 법인세율만 적용받으면 된다. 세금만 수억 원 차이가 난다.
회계 장부가 엄격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국가는 왜 법인사업자에게 이런 혜택을 줄까?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법인사업자는 여러 투자자들이 함께 돈을 내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개인사업자보다 규모가 크다. 국가가 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이유는 큰 사업이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큰 기업이 많아야 국가 경제가 더 나아진다는 취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법인사업자라고 마냥 혜택만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법인사업자가 혜택만 누린다면 아무도 개인사업자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법인사업자는 개인사업자에 비해 훨씬 엄격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개인사업자는 말 그대로 개인의 사업체이기 때문에, 장사를 해서 돈을 벌면 사장님이 그 돈을 자기 돈처럼 쓰면 된다.
하지만 법인사업자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공동으로 투자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장님이라고 회사의 돈을 절대 제 멋대로 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설혹 투자자가 사장님 혼자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법인사업자라는 이유로 개인사업자에 비해 세금도 할인받고 각종 혜택도 제공받았기 때문에 법인사업자는 국가가 정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주식회사의 경우 일정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면 반드시 회계장부라는 것을 작성하고 그것을 감독기관에 제출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회계장부란 그 회사가 번 돈과 쓴 돈을 모두 정확하게 기록한 장부를 뜻한다.
왜 이렇게 하느냐? 회사가 사장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투자자(주주) 공동의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공동 주인인 주주들에게 회사의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게다가 요즘은 주식 거래가 활발해져서 누구나 주식만 사면 회사의 공동 주인(주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규모가 큰 회사들은 아예 회계장부를 일반인들에게까지도 모두 공개한다. 기존 주주들뿐 아니라 그 회사의 주주가 될 생각이 있는 예비 주주들에게까지 회사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린다는 취지다.
이게 바로 개인사업자보다 법인사업자가 불편한 점이다. 법인사업자는 개인사업자보다 훨씬 투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장부에 화장을 한다고?
우리는 재벌이 북도 치고 장구도 치는 요상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선진국의 대부분 주식회사들은 전문경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회사의 경영을 맡긴다. 그리고 회사의 공동 주인인 주주들은 주주총회라는 회의를 통해 누구를 전문경영인으로 세울 것인지 결정한다. 회사마다 사정이 좀 다르지만 전문경영인은 보통 3년 정도 임기를 보장받는다.
전문경영인의 임기를 제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주들이 3년 동안 지켜보겠다는 거다. 경영을 잘 하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3년 만에 해고하고 더 나은 전문경영인을 찾는다는 취지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3년이라는 시간을 얻은 전문경영인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당연히 경영을 잘 해서 다음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재신임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주주들의 기대만큼 실적이 좋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 보통이라면 전문경영인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해고돼야 한다. 그런데 이때 전문경영인에게 유혹의 손길이 접근한다.
“이대로 실적을 발표하면 당신은 해고야. 하지만 회사 사정을 주주들이 세세히 알지는 못해. 그러니까 회계장부를 조작하자.” 이런 유혹 말이다.
이래서 분식회계(粉飾會計)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분식회계란 기업이 회계장부를 고의로 조작하는 행위를 말한다. 분식회계에서 분(粉)은 ‘화장할 때 쓰는 가루’를 뜻하고, 식(飾)은 ‘곱게 칠한다.’는 뜻이다. 즉 분식회계란 엉망진창인 회사의 장부를 화장을 하듯 예쁘게 꾸미는 것을 말한다.
엔론(Enron)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2001년 망하기 전까지 석유나 천연가스를 채굴해 팔았던 에너지 회사였다. 그런데 1997년 이 회사의 전문경영인으로 임명된 제프리 스킬링(Jeffrey Skilling)이라는 자가 주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짓을 1, 2년도 아니고 무려 5년 가까이 계속했다는 점이었다.
제프리 스킬링 전 엔론 CEO ⓒ위키피디아
스킬링은 회사가 벌지도 않은 돈 12억 달러를 회사가 번 돈처럼 장부에 기록했다. 이런 엄청난 실적 덕에 엔론의 주가는 2000년 한 해 동안 갑절 가까이 뛰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주가 상승률은 350%나 됐다. 엔론은 미국 7위 기업으로 성장했고, 경제 종합지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16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분식회계라는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다.
무너지는 모래성, 엔론의 파산
2001년 스킬링은 자신이 5년 가까이 저지른 분식회계가 들통이 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스킬링은 그해 3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천사들과 한 편이죠.”라고 떠드는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 그는 2001년 1월부터 7월까지 자신이 보유한 엔론 주식 1,750만 달러어치를 냉큼 제값 받고 팔아치웠다. 그리고는 분식회계가 들통 나기 직전인 8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회사를 사임해버렸다.
그 해 9월, 사상 최악의 테러로 불리는 9.11 테러가 미국을 덮쳤다. 그렇지 않아도 침체 상태였던 미국 경제는 이 테러로 직격탄을 맞았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이 쑥대밭이 됐다.
엔론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분명히 장부상으로 엔론은 돈을 엄청 벌었다. 하지만 사실 엔론의 금고는 텅 비어있었다. 사업을 위해 엔론은 금융회사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는데, 9.11 테러로 금융회사들의 경영마저 위축되면서 엔론은 돈을 빌릴 곳을 잃었다. 텅 빈 금고를 더 이상 숨기고 사업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01년 9월 중순, 엔론 경영진이 마침내 “과거 장부를 다시 검토해 보니 분식회계가 있었다”며 잘못을 고백했다. 그 규모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1조 원이 훌쩍 넘었다.
물론 이 금액이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엔론은 2001년 예상 매출이 200조 원이나 되는 거대 기업이었다. 1조 원대 분식회계만으로 회사가 망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투자자들의 신뢰였다. 주식회사가 회계장부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주주들과 예비 투자자들에게 경영을 투명하게 보고해 신뢰를 얻는다는 차원이다. 그리고 이 신뢰는 자본주의의 근간인 주식회사의 핵심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주식회사 제도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신뢰가 없다면 회사 발표를 어떻게 믿고 그 회사에 투자를 한다는 말인가?
엔론이 분식회계 사실을 발표하자 투자자들은 엔론 주식을 사정없이 팔아치웠다. 엔론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도 “더 이상 엔론을 믿을 수 없다.”며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한꺼번에 독촉에 나섰다.
2001년 초 80달러를 오르내리던 엔론 주가는 분식회계를 발표한 이후 40일 만에 20센트로 폭락했다. 9.11테러로 경기까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엔론에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그 해 12월 2일 엔론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고 말았다. 미국 7위의 거대기업이 한 순간에 망한 것이다.
미국 법원은 2006년 분식회계를 주도한 스킬링에게 무려 2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던 스킬링은 2018년 4,000만 달러를 투자자들에게 배상하기로 하고 석방됐다.
하지만 그가 과연 죗값을 다 치렀는지는 의문이다. 엔론의 분식회계와 파산이 회계장부에 대한 신뢰를 목숨처럼 중시하던 미국 자본주의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가 “엔론 사태가 9.11 테러 공격보다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이 더 컸다”고 일갈한 이유다.
아무튼 엔론은 역사상 최악의 분식회계 기업이라는 오명을 남긴 채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