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정일 칼럼]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

신성아의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마티,2023)을 읽으며, 지난 여름 더위를 잊어볼 양으로 읽었던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비채,2023)를 떠올렸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추리소설 작가가 쓴 이 작품은 성당 종루에서 목매단 리타(44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경찰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으나, 파킨슨병으로 딸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던 어머니 엘레나(63세)는 리타가 절대 자살했을 리 없다고 믿는다. 오래전에 사망한 남편이 어린 딸에게 성당의 십자가가 번개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가르쳐준 이래로 리타는 비바람 치는 날이면 낙뢰가 무서워 성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알고 있다. 딸은 타살당하지 않았다.

간병 ⓒpixabay

국회의원 보좌관이던 신성아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소아백혈병 진단을 받자 직장에 사표를 내고 딸의 전속 간병인이 되었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마티,2023)은 약 1년 6개월 넘게 딸을 간병해온 지은이의 간병일지로 볼 수도 있지만, 내용은 간병일지라는 개인 경험을 훨씬 뛰어넘는다. 지은이는 이 책 곳곳에서 “정치의 실패는 사랑을 무너트린다”(119쪽)라고 말한다. 정치의 공적인 특성과 사랑의 사적인 특성상 정치와 사랑은 물과 기름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던가.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정치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이견 조정과 합의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간의 숱한 갈등이 폭력 사태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대개 공동체 안에서 해결되는 것은 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생명 존중, 인권 보호처럼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견이나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협력하며 우리는 그것을 정치라고 부른다.”(110쪽) 이견이나 문제를 토론과 타협을 통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정치의 존재 방식은 고스란히 사랑에도 적용되어야 하고, 사랑으로 결실을 본 가족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사랑도, 가족의 시발도 원래는 타인이었던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 여기에 정치(이견 조정과 합의)가 없을 수 없지만, 우리는 가족은 정치의 행위자가 될 수 없으며 스위트 홈은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곳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안에서는 정치를 찾기 힘들다. 가족 안에서의 정치는 정상가족의 재생산을 위한 정치다. ‘건강한’ 부부싸움을 하고, 자녀에게 절대적 안정감을 주고, 내 안의 어린 나를 돌아보고 부모님을 용서하라는 식의 조언이 가족 안에서의 정치를 대신한다. 정상가족 재생산을 위한 가족 내 정치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가부장제와 남녀역할분담론을 되풀이 한다. 예컨대 지은이의 사례에서처럼, 집안에 중병 환자가 생겼다면 남편과 아내 가운데 누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까. 바로 아내(여성)다. ‘답정너’가 정해져 있는 곳에 정치는 없다. 공감과 이해에 선행하는 자유의 존중, 이것이야말로 모노가미의 윤리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유지하면서 여성에게 재생산(가사노동·돌봄노동)을 떠맡겼다. 가족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방식은 남성 단독 생계부양자 모델이라는 주장을 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남성도 있지만,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해고와 폐업이 일상화된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맞벌이가 대세인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남편의 가사 노동 시간은 2004년 32분이었다가 2019년에 이르러서야 54분이 된다. 1년에 약 1분 20초씩 늘어났다는 말인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본성으로 부여한 이 굴레를 벗어나려면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14세기 흑사병을 능가하는 한국의 인구 감소
고정된 성 역할의 낡은 프레임을 바꾸지 않는 이상
출산율은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할 것

작년 12월 2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한국은 소멸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국의 인구감소 상황을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 몰고 온 인구감소를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 CNN 방송은 같은 달 29일 한국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때문에 충분한 군인 수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은이는 해결의 묘수가 없는 출생률 낙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이 사회 진출이 늘어나며 엄연히 공적 역할을 획득했는데 남성들은 가정 내 역할을 바꾸지 못했다. 순전히 아빠들의 직무유기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남성들이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할 사회가 기존의 고정된 성역할을 은밀한 방식으로 강화해온 탓이 크다. 이 낡은 프레임을 바꾸지 않는 이상, 한국의 출산율은 단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인구절벽, 출생률 쇼크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시책이 아니다. 모두가 삶의 질을 올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마땅히 필요한 과정이다.”(84쪽) 금태섭 새로운선택 공동대표는 가정에서의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남성 독박 징병’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사 이래 여성이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게 된 것과 ‘병역 성평등’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준석 개혁신당 공동대표와 금태섭 새로운선택 대표  ⓒ뉴스1

『엘레나는 알고 있다』에 나오는 리타는 파킨슨병으로 아이나 같아진 어머니를 돌보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신성아의 말처럼, 모든 여성이 모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사임당이 병원에 가면 나이팅게일이 될 것이란 환상을 버려야 한다.(63쪽) 리타는 아이(=어머니)를 돌보는 과중한 일 때문에 자살을 했다. 엘레나는 딸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과 자신이 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어서 딸이 타살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성아의 논픽션과 피녜이로의 소설에도 비중 있게 나오듯이 중병을 앓는 환자가 있는 가족이 당면한 최고의 걱정은 병원비와 약값이다. 병원비와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자족이 동반 자살을 하거나, 부모와 자식이 가족을 버리는 일도 자주 있다.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 점에서도 옳다. 의료와 복지 정책의 실패는 도처에서 사랑을 무너트린다. 신성아가 “한국 정부가 암과 전쟁을 선포하고, 현행 건강보험을 개혁해 어디서든 암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177쪽)라고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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