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그가 1882년에 출간한 『즐거운 학문』 여러 곳에 처음으로 발설되었다. 이 선언에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은 기독교의 신이지만, 기독교의 신이 인간에게 강요해온 진리관도 이때 함께 처형되었다. 일타쌍피. 유일신론은 유대 역사에서 태어난 신앙이자 인류의 종교 발전 과정에서 가장 뒤늦게 나타난 신앙 형태다. 다신론의 세계에서는 신이 여럿인 만큼 진리도 중구난방이고 선악에 대해서도 융통성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유일신론에서는 유일신 이외의 신이 모두 악마인 만큼 진리 역시 하나여야만 하고 선악도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이 강요하는 진리관이 삶의 다양한 관점을 외면하고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고 본다. 진리나 선악 판단은 초월적·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정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언론과 국민의 공복(公僕)인 고위 공무원, 그리고 학문적 양심을 지켜야할 학자들이 자신의 이익이나 밥줄을 거머쥔 권력의 조종에 따라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외친다. 진리가 권력의 의중에 따라 사슴이 말이 되기도, 말이 사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솔선하는 자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다 위에서 내려와서 하는 거야.”(한나당 소속 제17대국회의원 송영선의 명언) 니체가 우리에게 ‘힘에의 의지’를 갖추고 초인(Übermensch)되기를 주문한 것도 다 진리(=권력)의 횡포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었다.
블레어 전 영국총리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두 사람은 잘못된 정보 판단을 따라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2002.9.7 ⓒAP
“(신과 함께) 진리는 죽었다”라고 선언함으로서 니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가 되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 미국에서는 신도, 유일신론의 진리관도, 유일신론 진리관이 고수하는 선악 이원론 그 어느 것도 죽지 않았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아들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중립지대는 없다. ‘적과 동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세계를 윽박질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시의 편’이 되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북은 9·11 테러 이틀 뒤인 9월 13일 “UN 회원국으로서 모든 형태의 테러, 그리고 테러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반대하며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했고, 두 달 뒤엔 ‘테러 자금 조달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과 ‘인질 억류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에 가입했다.
김정일의 노력은 효과가 없었다. 2002년 1월 29일 부시는 의회 연두교서에서 북을 이란·이라크와 묶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북을 미국의 ‘3대 주적’의 하나이자, “선제공격으로 정권교체를 해야 할 대상”(이상 이제훈,『비대칭 탈냉전』,서해문집,2023,210~211쪽)으로 지목했다. 연이어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네오콘의 선악 이분론은 핵개발 초기 수준의 북한을 자극해 북의 핵무장을 자초했다.
지구상 유일하게 기독교 근본주의로 남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 아닌데도 선악 이분론을 믿는 대한민국 미국이 강요하고 우리가 내재화한 유일한 진리, 한미동맹
대한민국은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가 아닌데도, 미국과 똑같이 죽은 신과 억압적인 진리와 선악 이분론을 믿는다. 남한의 신은 ‘미국’이고, 진리는 ‘숭고한 한미동맹’이며, 선악 이분론은 ‘미국 핵은 선, 북한 핵은 악’이다.『니체 대 문재인』(보민출판사,2024)을 쓴 김호는 어느 나라에는 핵무기가 용인되고, 어느 나라는 절대 핵무기를 가져서 안 되는 이유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인류의 평화이다. 하지만 그 규칙은 누가 세우는가? 가진 자가 세운 규칙일 뿐이지 인류의 불편부당하고 보편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미국 핵은 사람을 살리는 핵이고, 북핵은 사람을 죽이는 핵인가?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됨을 강요받는다. 자기 스스로의 생각은 아니다. 누구에 의해서? 제국의 횡포와 내 안의 사대에 의해서. 북핵이 문제라면 실질적인 위험으로서 미국 핵도 같은 기준으로 지켜봐야 하건만 늘 그렇듯이 우리는 미국 앞에서 외눈박이다.”(86~87쪽)
현재 남북관계의 모든 틀은 북핵과 연동된다. 그런데 개성공단 재개와 금강산 관광 등의 대북 정책을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의 비핵화와 연동하는 것은 미국에 굴종하는 것을 착실히 내면화해온 남한의 노예근성이다. 북핵과 연동되어야 할 것은 남한의 대북정책이 아니라 미국 핵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3만 6천명, 베트남전쟁에서 5만 8천명의 전사자를 내고서도 북한과 북베트남에 이기지 못했다. 북한과 새로 전쟁을 한다면 미국은 다시는 그처럼 어려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로 끝장을 본다는 말이다. 북한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과 종전ㆍ평화 협정을 맺을 의사도 없으며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북한에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북핵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조국 구속, 공수처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이처럼 북핵은 미국 핵과 연동되어 있는데도, 남한 정부는 북핵이 우리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총대를 맨다. “예속적인 한미동맹 아래 미국의 이익으로서 북핵 제거를 민족 내부 거래인 남북경제협력을 그 협상의 대가로 내세운다. 즉 내 것을 그들[북한과 미국]에게 주며 그들을 위한 협상을 하는 것! 이것이 소위 문재인이 내세운 중재자론, 운전자론으로서 공동선언과 남북경협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내외에서 환멸과 멸시를 받아온 이유이다.”(270쪽) 김호는 한반도에서의 핵사용 가능성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북핵 논의를 낙후시키고, 핵을 장착한 북한의 ICBM(대륙간 탄도탄)이 태평양을 건너가는 가능성을 지렛대 삼아, 모든 나라의 비핵화를 끌어내는 세계 평화 논의의 장으로 북핵 문제를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강요하고 우리가 내재화한 유일한 진리(한미동맹)와 이분법(미국은 선, 북한은 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김성해는 『벌거벗은 한미동맹』(개마고원,2023)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쪽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쪽은 무조건 틀렸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면 된다. 미국도 틀릴 수 있고, 중국과 러시아도 맞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판단은 한국의 몫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이면서, 균형감 있고, 또 합리적이고 성숙하게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된다. 지식인과 언론이 그 역할을 맡는다. 미국과 유럽의 목소리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행태를 그만두는 게 출발이다.”(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