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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학전, 33년의 마침표를 찍다

2024 학전 어게인 ⓒ학전

학전이 문을 닫았다. 1991년 3월 15일 김덕수네 사물놀이 ‘소리굿’으로 문을 연 지 33년 만의 일이다. 다들 알고 있듯 학전은 ‘아침이슬’의 싱어송라이터 김민기가 서울 대학로에 연 공연장이다. 그동안 김광석, 노영심, 노래를찾는사람들, 박학기, 안치환, 한동준을 비롯한 음악인들이 콘서트한 공연장이며, 김대환, 남정호, 춤타래 무용단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펼친 공간이기도 하다. 학전을 유명하게 만든 공연은 김광석의 릴레이 콘서트와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김민기표 노래극인데, 학전 블루와 학전 그린을 거쳐 간 이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 무수한 배우, 음악인, 스태프들이 학전 무대를 만들고 오르며 관객을 만나 학전의 역사를 함께 일구었다. 관객들 역시 학전을 찾아 울고 웃었다. 학전은 많은 이들의 꿈과 눈물, 젊음과 감동이 아로새겨진 보금자리다.

대학로의 공연장이 학전 뿐만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학전이 대학로에 있어 대학로를 찾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으며 학림에 들러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학전에서 이런저런 공연을 보면서 김민기의 정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 정신은 예술가들이 맘 편히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열어주려는 배려이고, 좋은 공연을 선보이려는 의지이며, 예술을 통해 영혼을 맑게 하려는 마음 아니었을까. 그동안 학전이 선보인 공연은 한 사람의 정신을 푸르게 하는 단비이고, 세상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하는 회초리였다. 존재하지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을 껴안으려는 마음이기도 했다. 김민기의 노래극 속 인물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떠올려보라. 부랑자, 어린이, 창녀, 청소년을 무대로 계속 불러낸 이유는 연민이고 사랑이며 존중이자 증언이다. 학전은 김민기의 청년정신을 길어 올려 세상을 적신 오래된 우물이다.

2024 학전 어게인 ⓒ학전

그럼에도 학전이 문을 닫는 것은 김민기의 퇴장이자 김민기 시대의 마침표나 마찬가지다. 언론에는 김민기의 와병과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알려졌는데, 김민기가 펼쳐온 이야기들이 달라져 버린 세상, 변해버린 대학로에서 버티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대학로에는 여전히 많은 공연장이 있어도 이제 대학로에서는 대중음악 공연이 열리지 않는다. 서울의 경우 김민기와 김광석을 존경하는 음악인들은 대부분 홍익대학교 앞에서 공연을 펼친다. 대학로는 매끈한 뮤지컬 공연장이 대세가 되었고, 성인관객들은 여전히 공연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지만 2010년대부터는 어린이 노래극 공연에 집중한 학전을 찾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원래의 설정을 바꾸지 않고 최근까지 진행한 지하철 1호선 공연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불편한 공연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인정하자. 한 사람의 거장이 세상의 변화를 모두 짊어지거나 뚫고 가기는 불가능하다. 대중음악 문화가 바뀌었고, 대학로가 달라졌으며, 관객들도 변했는데 33년이나 버텼다는 사실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공간이지만 현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학전을 닫기 전 15일간 20회 공연을 진행한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아쉽고 서운하고 안타깝지만 학전을 학전답게 마무리하려는 마지막 소리굿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학전 무대에 섰던 예술가들과 스태프들이 관객들과 나눈 꿈과 정신을 되새기며 함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33년 동안 함께 있었고, 이곳에서 피어났으며, 정말 고마웠다고, 이제 공연장 밖에서도 꿈을 이어나가자는 약속을 하기 위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출연하고, 15일 20회 공연을 매진시킨 게 아니었을까.

2024 학전 어게인 ⓒ학전

다행히 공연 전후 수많은 마음이 모여 밀린 임대료와 퇴직금은 모두 해결했다고 한다. 이제 학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공연장으로 거듭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학전이 33년의 긴 여정의 종지부를 찍는 지금, 되새기고 싶은 것은 학전이 만들어낸 작품과 성과만이 아니다. 더 이상 학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기를 바라는 김민기의 결단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남기려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김민기는 자신의 퇴장과 함께 학전의 간판을 뗌으로써 담담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학전의 이름을 남겨둘 수도 있을 텐데, 자신과 학전이 선보였던 이야기와 방식은 여기서 끝임을 인정하고 퇴장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좋은 공연을 만들고 나누고 즐기는 일은 남은 예술가와 스태프와 관객의 몫임을 분명히 했다. 퇴장 또한 김민기답다. 고용승계를 사양한 학전의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김민기가 학전을 통해 나누려 했던 정신은 수많은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이 다른 현장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곳이 홍대 앞 클럽 빵이거나 공연장 벨로주 같은 곳이 아닐 리 없다. 어떤 이들은 학전이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겠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다른 공연장이 더 친근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다만 그 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과, 학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세대/경험/사회적 지위가 다를 뿐이다. 오래 이어가고 있는 공연장들이 아직 학전만큼의 권위와 명성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학전이 해온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심하며 공연을 만들고 기획하는 기획자와 스태프와 예술가들의 공간을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만큼 중요한 일은 오늘의 노력을 지켜내는 일이다. 지금 학전은 곳곳에 있다. 그 곳에서 계속 만나자.

2024 학전 어게인 ⓒ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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