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소영의 교사생각]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책임

오늘도 일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는 잘 지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특성화고 중에서도 서열 맨 아래쪽인 공업계 특성화고에 가서 휴직 2년 포함 7년을 꽉 채우고 인문계고로 전보를 앞둔 때였다.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현장실습제도 및 일·학습 병행제도가 18세 미만 청소년을 위험한 노동에 노출시켜 ILO 138호 협약(아동노동금지 협약) 위반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이 얹힌 음식처럼 잘 소화되지 않는다. 부대끼며 지내온 특성화고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감정노동인 콜센터에 내몰린 특성화고 실습생을 그린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내가 만난 일하는 아이들


특성화고에 가서 첫해에 만난 창현이(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명임.)는 지각이 잦고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자기 일쑤였다. 아이들의 얼굴이 아니라 정수리를 보며 수업을 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라 난 아이들을 자주 깨웠는데(특히 특성화고 첫해에는), 창현이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집요하게 깨워 겨우 일어난 창현이는 새벽에 상하차 알바를 뛰고 와서 지금 자야 한다고 말하고는 다시 엎드렸다. 그러게 왜 새벽에 알바를 뛰고 오냔 말이다. 그것도 힘들다는 상하차 알바를! 나의 이런 잔소리는 창현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학생이 학교를 중심에 둬야 한다는 내 생각은 창현이의 삶을 모르고 하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날 상하차를 하다 허리를 삐끗한 창현이는 국어 수업 후에 조퇴를 했던가?

한편 준성이는 가끔 졸기는 하지만 수업 시간에 엄청 성실한 태도로 참여했는데, 알고 보니 거의 매일 주유소 알바를 하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주유소로 출근하는 준성이는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경’의 삶을 살면서도 씩씩했고, 난 준성이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언젠간 이런 일도 있었다. 늦은 귀가 중 집 근처 인적 없는 골목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따라오다가 내 옆에서 속도를 늦추더니 급기야 멈추는 것이다. 난 긴장하며 핸드폰을 쥔 주먹에 힘을 빡 주었다. 여차하면... 그 순간 “국어 선생님, 안녕하세요?”하는 것이었다. 배달일을 하는 옆 반 광호였다. 그 후 난 배달 중인 광호를 집 근처에서 몇 번 더 보았고, 눈이 오는 날이면 광호의 안전을 빌었다.

국어교사인 나는 특성화고에서는 3학년 담임을 못 받았다. 특성화고 3학년 시간표는 전공 과목으로 채워져 있어서 기타 과목(국영수사과 등을 특성화고에서는 기타 과목이라 부르곤 한다.) 교사들이 고3 수업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현장실습에 내보낸 경험이 없다. 그렇지만 현장실습 나가기 전부터 일하는 아이들을 흔하게 만났다. 이들의 노동은 위험하지 않은 노동일까?

위험한 노동, 안전할 리 없는 현장실습

ILO 138호 협약은 노동할 수 있는 최저연령을 명시해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협약으로 ILO 협약 중에서도 핵심 협약이다. 우리나라는 1999년에 이 협약을 비준했다. 이에 따르면 청소년의 건강, 안전 및 도덕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경우, 노무의 취업 최저연령은 18세다. 여기엔 예외 조항이 있는데 “청소년의 건강·안전 및 도덕이 완전하게 보호”되고, 더불어 “활동 부문에서 충분한 특별교육 또는 직업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조건”으로, 16세부터 노무를 허가할 수 있다. 즉, 청소년 건강·안전·도덕이 완전히 보호되고 구체적인 지도나 훈련을 충분히 받을 때만 현장실습은 허용될 수 있다.

ILO에서 현장실습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 알려지자 정부는 바로 반론 보도자료를 냈다. “현장실습생의 안전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행정)기관 및 공인노무사가 참여하여 현장실습 참여 산업체에 대한 사전 점검, 현장실습 중 상시 모니터링, 정기 지도·점검 등을 통해 철저히 관리 감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올해부터는 상시 모니터링에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하겠단다. 이런 조치들이 얼마나 형식적인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나는 반론 속 좋은 말들의 대향연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부의 해명과 달리 특성화고 학생들은 현장실습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현장실습 나갈 때 작성한 표준협약서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고 실습 중 하루 12시간 넘게도 일할 때도 많았다는 주남이, 전공 과목과 전혀 관련 없는 위험한 일을 하는 공장에 현장실습을 갔던 건 인생사기였다고 말하는 광진이. 조금만 들으려고 노력하면 학생들의 호소를 들을 수 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현장실습 사고가 현실을 방증한다. 지난해 11월 서동용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직업계고 현장실습장에서 안전사고 53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것인가?

현장실습 중 잠수한 채 요트에 붙은 따개비를 떼는 작업을 하다가 바다에 빠져 숨진 故 홍정운 님. 그 현장실습업체의 사장은 사고 1년도 안 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우리나라는 산업재해가 일어나도 그 사업주에게 매우 관대하다. 그러니 현장실습은 물론이고 당최 노동이 안전하지 않다. 우리나라 2023년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598명이다. 3일에 5명은 일하다 죽는 나라, 그나마 조금 줄었다는 수치다. 현실에 이러함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실형 확정은 지금까지 딱 한 건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안전한 현장실습이 가능할 수 있을지.

2021년 10월 16일 여수시청 앞에서 고 홍정운 군 친구들이 피켓을 들고 촛불추모제를 하고 있다.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책임

정부는 좋은 말로 반론 자료를 낼 게 아니라 위험한 현장실습 현실을 인정하고 ILO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정부에게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나는 한 박자 쉰 후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일부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만들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나. 그러니 우리도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사실 누가 책임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그 책임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현장실습과 우리의 노동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아직은 작은 목소리일지라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 많은 교사와 학생들, 어른과 아이들, 누군가의 가족들…. 특성화고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이들을 좀 더 알게 되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하루하루가 펼쳐진 특성화고에서의 시간이 소중한 건 이 때문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계속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의대 정원 확대로 시끄러운 와중에 특성화고 학생들의 얘기를 한 번이라도 더 하는 이유다. 연대가 우리를 살릴 것이므로.

편집자주

이 글은 교육희망에도 함께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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