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말’이 또 말썽이다. 의대 증원 규모 2천 명을 둘러싼 의-정 대치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예고했다. 의료계는 물론이고 국민들은 당연히 대통령의 유연한 입장을 기대했다. 총선을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여당 정치인들이 ‘2천 명 숫자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며 윤 대통령의 몽니에 불만을 표출하던 와중이라 더욱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담화는 놀라울 정도로 경직된 내용으로 가득했다. 윤 대통령은 “2천 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하여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기존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거듭 확인했다. 전공의들을 향해서는 “독점적 권한을 무기로 의무는 팽개친 채 국민 생명을 인질로 잡고 불법 집단행동을 벌인다면, 국가는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은 진료거부 전공의들과 총파업을 시사한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를 겨냥, “우리 사회에 중대한 위협”, “기득권 카르텔”, “직역 카르텔” 등 적대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담화 말미에는 “기득권 카르텔과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누가 봐도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수도권은 물론 PK(부산·경남) 지역마저도 아성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 국민의힘 정치인들 입에서 윤 대통령 담화에 대한 우려 섞인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숫자에 매몰되어선 안된다. 다수 국민은 지금 상황이 조속히 해결되는 것을 바란다”고 했고, 한 위원장이 영입한 함운경 서울 마포을 후보는 “윤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9일 동안 정치에서 손 떼고 공정한 선거관리에만 집중하시라. 그렇게 행정과 관치의 논리에 집착할 거 같으면 거추장스러운 국민의힘 당원직을 이탈해주기를 정중하게 요청한다”며 거칠게 반응했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대통령실에서는 복수의 경로로 “윤 대통령 담화는 2천 명 숫자 변경 가능성을 열어둔 말”, “얼마든지 열어놓고 논의할 수 있다는 것” 등의 해석을 내놓았다. 성태윤 정책실장도 그날 밤 KBS 방송에 나와 “정부는 2천명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의대 증원 규모를 포함해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 근거 제시된다면 정부 정책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담화 내내 2천 명 증원의 정당성을 피력하면서 의사들을 불법 행동을 일삼고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된 기득권 카르텔로 몰아붙였는데,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시해야 한다.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 근거가 제시된다면 정부 정책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윤 대통령 담화 중 한 단락이었다. 아무리 몇 단계를 건너뛰어서 추론해봐도 윤 대통령의 말은 절대 참모들의 해석과 부합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 담화 내용과 전혀 다른 참모들의 말에 국민들은 되려 혼란에 빠졌다.
윤 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백번 양보해 ‘대통령 스타일이겠거니’ 하더라도, 담화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까 싶다. 참모들의 해석대로 윤 대통령의 뜻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면 담화 내용이 그렇게 나와선 안 된다. 최대 쟁점인 ‘2천 명’이라는 숫자에 대해 ‘내가 옳다’는 근거를 줄줄이 나열하고, 협상 대상을 불법 집단으로 몰아가는 건 협상을 하겠다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의료계는 “거짓말”이라며 미동도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이 협상의 룰을 몰라서 그렇다면 갈등 관리의 무능함을 보여준 것이고, 실제로 ‘대화를 해보자’는 취지였다면 언어 능력이나 공감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평소 국정운영과 관련한 의사 결정이 이런 식의 알아듣기 어려운 소통 과정을 거쳐서 이뤄졌을 거라고 상상하면 섬뜩할 지경이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해야 하는 참모들이 대통령 말을 해독하는 데에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현실 역시 통탄할 노릇이다.
윤 대통령의 담화는 해석의 여지가 없고, 참모들의 설명이 이를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의사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면 ‘2천 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윤 대통령의 분명한 입장이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