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지방 선거에서 야당의 승리를 이끈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사진=뉴시스
편집자주
튀르키예 지방 선거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의개발당(AKP)이 창당 22년만에 처음으로 참패했다. 78.5%의 투표율 속에서 AKP는 81개 광연단체장 중 15개 지역을 잃어 24곳을 차지했고,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는 5대 도시를 포함한 35곳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이번 선거를 통해 주요 도시의 통제권을 다시 확보하려던 에르도안은 중대한 타격을 입었고, 재선에 성공한 CHP의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2028년으로 예정된 대선에서 에르도안의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했다. 이번 선거가 튀르키예 정치의 새 장을 여는 신호탄이라고 평가하는 포린폴리시의 기사를 소개한다.
튀르키예 정치가 다시 흥미로워졌다. 오랜 기간 동안 튀르키예의 야당은 무기력했다. 케말 킬릭다로글루가 이끄는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는 25~30% 이상을 득표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돌파구를 찾았다. CHP가 최대 도시 이스탄불, 수도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 등 5대 대도시의 시장직을 싹쓸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크렘 이마모을루(52) 이스탄불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며 1990년대 중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70) 대통령이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며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한 이후 가장 역동적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집권 정의개발당(AKP)은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15개 지역을 잃고 81개 광역단체장 중 24곳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2019년 지방선거에서는 AKP의 주황색이 동에서 서로, 아나톨리아 중부의 남부에서 북부로 쭉 이어지며 튀르키예 지도를 거의 완전히 덮었다. 그런데 불과 5년 만에 주황색이 거의 이어지지 않고 튀르키예 북동부부터 띄엄띄엄 있다가 중부 지역에서 CHP의 빨강 벽에 부딪힌다.
게다가 쿠르드계 정치인에 대한 에르도안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민족평등민주당(DEM)의 보라색이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극우 성향의 민족주의운동당의 파란색도 전국에 흩어진 여덟 군데를 차지했다. 튀르키예의 지도만 봐도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를 단번에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당의 참패다.
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다. 집권 여당이 강해서가 아니다. 사실 한때 튀르키예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했던 AKP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AKP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에르도안의 AKP는 지난 10여 년간 언론, 법원 및 의회를 이용해 야당의 입지를 좁히는 데 점점 노련해지면서 권력을 유지해 왔다. 억압과 폭력도 쓰면서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지 못하는 튀르키예 국민은 그런데도 에르도안과 AKP을 심판하기 위해 3월 31일 투표소로 몰려나와 터키인의 정치적인 강인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로서는 지금이 세계적으로 비민주주의적인 지도자들이 겉으로 민주적인 기관과 제도를 이용해 반민주적인 목표를 추진하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비민주주의 시대라는 생각을 약화시켰다.
에르도안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선거 권위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떠오르기 전부터 비민주주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런 에르도안이 정치 인생 최대의 타격을 입었다. 정치 논평가들은 수년 만에 처음으로 추호의 과장도 없이 AKP 이후의 튀르키예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하는 것보다 에르도안에게는 상황이 더 나쁘다. 이번 선거에는 패자가 여럿이지만 확실한 승자는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이마모을루이다. 이마모을루는 AKP의 무랏 쿠룸에게 51%대 39%로 압승을 거뒀는데, 사실 이스탄불 시장 선거는 이마모을루와 쿠룸 간의 경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마모을루와 에르도안 간의 싸움이었다.
에르도안은 쿠룸 전 환경개발부 장관을 지원하기 위해 17명의 장관을 파견해 튀르키예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인 이스탄불에서 선거운동을 벌이게 했고, 본인도 여러 차례 유세하는 등 총력전을 펼쳤다. 사실 보수 언론은 [인지도가 높지만 지난해 대지진으로 정권 심판 여론이 높아졌는데 ‘지진 위험으로부터 이스탄불을 보호할 실무형 테크노크라트’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가 역풍을 맞은] 쿠룸의 유세 모습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마모을루가 에르도안이 직접 고른 여당 후보를 상대로 2019년의 두 번에 이어 연속 세 번째 승리를 거둔 것이다.
AKP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치 라이벌, 2028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다. 51%이라는 이마모을루의 득표율은 AKP의 지지율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이다.
2023년 5월 대선 때 케말 클르츠다울루 대신 이마모을루가 야권 단일 후보였다면 오늘의 튀르키예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지난 일요일에 이마모을루 대통령이 여당의 대승을 축하했을 것이다. 이마모을루와 쿠룸의 11% 격차는 당시 이마모을루가 대선 후보였다면 승리하면서 에르도안과 나타났을 예상 격차 10%와 거의 똑같다.
그러나 이마모을루가 4년 후 에르도안에게 실제로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검찰이 [‘2019년 3월 19일 이스탄불 시장 선거를 취소한 이들은 바보’라는 이마모을루의 발언을 빌미로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리할 경우 이마모을루는 이스탄불 시장직을 유지할 수도, 대선에 출마할 수도 없게 된다.
야당에 뺏긴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되찾겠다는 에르도안의 맹세 때문에 그의 실패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꼭 놀라운 것은 아니다. AFK가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국민의 정서와 동떨어졌다고 인식되는 후보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AFK의 약한 C-급 후보들을 보완하기 위해 에르도안은 직접 선거를 진두지휘하며 후방에 있는 실질적인 후보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에르도안의 화려한 말솜씨도 120%가 넘는 물가상승률 등 악화된 경제 상황을 만회하지 못했다.
경제적 압박 속에서 집권 22년 차의 에르도안과 AFK에 대한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튀르키예에 대한 에르도안의 장밋빛 비전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대신 AKP를 뽑지 않으면 지방 정부 서비스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약한 후보, 엉망인 경제, 에르도안의 윽박이 어우러져 3월 31일 여당의 참패를 가져왔다. 이스탄불에서는 이마모을루가 압승했고, 앙카라에서는 같은 당의 만수르 야바스도 거의 30% 포인트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AKP의 텃밭인 여러 지역에서 CHP가 승리했다.
에르도안이 이 암울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그건 어려워 보인다. 2013년의 게지 공원 시위와 2016년의 쿠데타 시도 등의 정치적 위기를 잘 넘겨온 에르도안이지만, 이번만큼은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만우절 이른 아침 에르도안이 앙카라에서 패배 승복 연설을 시작했지만 이스탄불에서 이마모을루의 승리 연설이 시작되자 수많은 방송국이 이마모을루로 카메라를 돌렸다. 좌절한 에르도안은 지쳐 보였다. 이마모을루는 환호하는 지지자에게 활기차게 연설했다.
그러나 조용히 패배를 받아들일 에르도안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후 튀르키예의 최동단 중심도시인 반의 시장 선거에서 DEM에게 크게 패배한 AKP 후보가 승복을 거부했고 폭력 시위가 확산했다. 그런데 이내 흔치 않은 장면이 펼쳐졌다. 에르도안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선관위가 결단력을 보이며 정당한 승자를 공식 인정했다. 그리고 시위도 자연스럽게 마무리 됐다. 튀르키예 정치의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