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노동자 국회의원 윤종오, 진보정치 26년

1998년 울산 북구의원으로 시작해 광역의원, 단체장 이어 국회의원까지

선거유세 중인 진보당 윤종오 후보 ⓒ윤종오 선거캠프

“노동이 없다면 세상이 멈춥니다. 인류의 역사는 노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민주 사회의 올바른 완성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입니다.”

울산 북구 산업로 오토밸리복지센터 4층에 있는 ‘울산노동역사관 1987’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지난 2014년 전국 최초로 세워진 노동박물관 ‘울산노동역사관 1987’과 이곳에 걸린 “노동이 없다면 세상이 멈춥니다”라는 문구는 ‘노동자 도시’ 울산 북구를 상징한다. 제22대 총선에서 노동자 도시 울산 북구의 선택은 윤종오였다. 윤 후보는 11일 오전 1시 30분(개표율 99.50%) 기준 55.14% 득표율로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지었다. 42.87%를 얻은 국민의힘 박대동 후보와 격차는 13%에 달했다. 그는 1998년 울산 북구의원을 시작으로 울산시의원, 북구청장, 국회의원을 두루 거친, 주민들 표현을 빌자면 “울산시장 빼곤 다 해본” 노동자 도시 울산 북구를 상징하는 노동자 정치인이다. ‘울산노동역사관 1987’도 그가 구청장으로 재직할 때 만들어졌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시작된 민주노조 활동
메가폰을 쥐고 선두에 나서다


196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부산으로 이사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과와 진학한 그는 졸업 후 부산 사상공단과 거제 대우조선소 등에서 일했다. 잔업, 특근, 철야 등 중노동에 시달렸던 그는 버티지 못하고, 일을 그만뒀다. 대학에 입학해 잠시 다녔지만, 어려운 경제 형편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고 공수부대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86년 현대차 울산 1공장 조립 노동자(컨베이어 맨)로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윤종오는 2018년 울산저널과 인터뷰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축구부터 테니스까지 못 하는 운동이 없는데도 컨베이어가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식사 한 시간인데 30분씩 연장해 일하고, 토요일은 의무 휴일이 아니니까 토요일도 일하고, 일요일은 무조건 출근이라 쉬는 날이 없어 기계처럼 로봇보다 빡세게 일을 했습니다. 임금을 받으면 월 17만 원, 18만 원씩 받았습니다. 그렇게 일해도 내 집을 가진다, 내 차를 가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던 시기였죠. 연말에 돈 많이 번다고 성과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절에 고작 런닝이나 팬티, 비누 쪼가리 정도 줬으니까요.”

1988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장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그렇게 로봇처럼 일하던 윤종오에게 1987년 7월 25일 아침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날 현대차 공장에 ‘노동조합을 결성하니 12시까지 본관으로 모이라’는 인쇄물이 뿌려졌다. 6월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노조가 만들어지던 시기였고, 현대차 노동자들도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조 신고에 앞서 현대차 사측에서 어용노조를 먼저 신고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날 어용노조에 맞서 본관 잔디밭에 모여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윤종오는 2018년 울산저널과 인터뷰에서 “진짜 노조 만드는 싸움이 벌어진 거죠. 처음 1~2천 명이 모였는데 4.5톤 트럭을 끌고 본관 잔디밭부터 시작해서 지금 노동조합 방향으로 사람들이 주욱 따라왔어요. 근데 누군가는 선동해야 하는데 아무도 없고 메가폰을 내가 쥐고 처음부터 선동을 한 거죠”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98년 노동법 날치기 저지 투쟁
현총련 조직국장 맡아 거리로
“임금인상이나 단체협약
투쟁을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깨달았어요”


이날은 윤종오의 운명을 바꾼 날인 동시에 울산의 운명을 바꾼 날이다. 이 시기 현대차뿐 아니라 울산지역 주요 사업장 대부분에 민주노조가 설립됐으며 울산지역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근간이 마련됐다. 그날 메가폰을 잡으며 윤종오의 민주노조 활동이 시작됐다. 윤종오는 노동조합 소위원과 4번의 대의원, 노조 총무차장과 총무부장, 1공장 대의원대표 등을 거쳤다. 총무차장으로 활동하던 1991년 성과급 분배 투쟁 때문에 그는 징계와 수배를 당했고, 한 달간 구속됐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저지 투쟁 당시 그는 파업과 거리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그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끈 계기가 됐다. 윤종오는 올해 초 ‘노동자독립언론 울산함성’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노동법개정투쟁(노개투)이였다. 김영삼 정권이 1996년 12월 26일 새벽 5시경 정리해고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는데, 이 사건을 통해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임금인상이나 단체협약 투쟁을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주변의 강력한 추천도 있고 해서 제가 직접 나서게 됐다. 당시 저는 현대자동차노조에서 쟁의조직 실장을 맡고,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 조직국장도 겸했는데, 노개투 때 태화강 둔치에서 한 달 정도 파업을 벌였다. 그때 제가 직책상 선두에서 집회와 시위를 이끌면서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생긴 것 같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결심하고
울산 북구 기초의원에 출마해 당선
지역사무실을 ‘염포주민문화센터’로
“열심히 하다 보니까
4년 후에 시의원이 돼 있더라고요”


그는 1998년 6월 치러진 제2회 지방선거에 자신이 소속된 현대차노조와 30개 민주노조의 추천을 받아 울산 북구의원 후보(염포동)로 출마했다. 염포동은 현대차 공장이 있는 곳으로 노동자 밀집 지역이다. 그는 ‘정리해고 반대! 살맛 나는 지역 건설!’, ‘고용안정, 지역발전’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운동에 나섰고,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북구의원 출마자 가운데 34살로 가장 젊었던 그는 구의원에 당선됐다.

윤종오 후보 선거포스터. 왼쪽부터 1998년 울산북구의원 선거, 2002년과 2006년 울산광역의원 선거 ⓒ선거자료

구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노조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활용했다. 윤종오는 ‘울산함성’과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노동자가 정치를 하면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일반인들의 의구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는 것이 모범답안이라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현장 활동 경험을 잘 살리면 지역사회에서 주민들한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들도 많았다. 예컨대 현장에서 대자보·소자보로 선전을 많이 하는데, 동네에서 제가 그런 것을 붙이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버스정류장, 아파트 입구 등에 주민 게시판을 만들고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의정활동을 알렸다. 자신의 지역사무실을 ‘염포주민문화센터’로 만들어 주부, 노인, 어린이 등 주민들의 요구에 맞춘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만 해도 주민센터의 문화프로그램이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인구가 만 명이 채 안 되는 동네였지만, 문화프로그램을 개설하면 8~90명이 참여할 정도였다. 특히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만들어 꾸준히 운영해 500명 이상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울산저널과 인터뷰에서 “스포츠댄스 동아리부터 시작해서 아주머니 글쓰기, 역사동아리, 심지어 연극동아리까지 만들고 연습해서 어린이날 발표 공연도 하고 아주 재밌게 4년을 뛰고 나니까 동네 꼬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죠. 모르면 간첩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까 4년 후에 시의원이 돼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4번 연속으로 선거 승리
광역의원 재선을 거쳐 북구청장 당선
연이어 진보진영이 패배했던
울산 북구에서 거둔 값진 승리


기초의원으로 경험을 쌓은 그는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울산광역시의회 북구 제3선거구에 출마해 한나라당 정윤석 후보를 누르고 광역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장 2석, 광역의원 3석, 기초의원 10석을 차지했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5%로 출발하였던 정당지지도가 28.8%까지 올라가면서 울산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제2당을 차지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울산시의원 19명 가운데 단 3명에 불과했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주목받았고, 윤종오는 세 차례 우수의원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리고, 4년 뒤인 2006년 치러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또다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이상만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으로 12년간 활동한 경험을 살려 윤종오는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울산 북구청장으로 출마했다. 당시 그에겐 울산 북구청장 탈환이라는 쉽지만은 않은 과제가 놓여있었다. 민주노동당은 2005년 치러진 울산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패배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선 울산 북구청장 자리도 한나라당에 내줘야 했다. 당시 민주노총 비리 사건 등으로 노동계에 악재가 닥쳤고, 민주노동당 소속 구청장 등이 추진한 북구 음식물자원화시설 설치 과정에서 주민과 갈등이 있었고, 완공 이후엔 악취로 민원이 이어지는 등 민심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면서 어려움은 가중됐다.

2010년 북구청장 후보로 출마한 윤종오 후보가 권영길 전 의원 등과 함께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진보정

이런 어려움 속에서 치러진 북구청장 선거에서 윤종오는 야권연대와 그동안 지역에서 12년 동안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역임하며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득표율 56.44%로 한나라당 유재건 후보를 제치고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는 주민들의 참여와 소통을 바탕으로 진보적 구정 실현을 목표로 삼고 여러 사업을 힘 있게 추진했다.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친환경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윤종오의 진보구정


그는 지난 2013년 통합진보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으로 ‘친환경무상급식’을 꼽았다. 울산 북구청은 2011년 전국에서 최초로 친환경무상급식을 시행했다. 특히 타 지자체와 달리 민관협력을 통한 사업 추진으로 사업 첫해 행안부에서 민관협력 부분 최우수상을 받는 등 전국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된 바 있다. 2013년엔 울산 북구 식재료 품질기준 수립뿐 아니라 농가체험, 식생활 교육, 안심 식재료 모니터링을 시행하는 한편 친환경 농가를 육성 및 농산물 판로도 확보했다. 그는 “급식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농촌의 새로운 소득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친환경작목반이 만들어져 2년 만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식재료의 33%를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농산물로 지원하고 있다. 도농복합 지역이라서 가능했지만 어마어마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노동자 도시’ 답게 노동자 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노사민정협의회를 구성해 납품단가 후려치기 근절, 산단 노동자를 위한 복지 사업 등을 지원했다. 3. 체불임금 없는 관급공사 운영 조례를 만들어 구청에서 발주하는 사업만이라도 임금체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차오름 장학금’을 만들어 비정규직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앞장서 추진했다.

이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울산 북구에서 신뢰를 잃는 원인이 되었던 음식물자원화시설을 ‘세대공감 창의놀이터’로 변신시켰다. 2008년 음식물 자원화 시설이 가동을 멈춘 후 방치되고 있던 시설을 ‘아이들을 위한 시설로 만든다면 지나온 갈등도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추진한 사업이다. 이후 전문가 자문과 주민 설득 등 여러 단계를 거쳐 2013년 건설을 시작해 구청장 임기를 마친 뒤인 2015년 건립이 완공됐다. 지금은 울산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시련 속에서도 주민의 편에 선 윤종오
한전 매곡변전소 관련 행정소송
코스트코 입점 허가 거부로
형사 및 민사소송 거치며
자택 등 압류 위기까지


주민을 위한 정치를 펼친 그였지만, 이 때문에 겪은 시련도 많았다. 2011년 주민 반대를 이유로 한국전력이 건설을 추진한 매곡변전소를 허가해 주지 않아 행정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소송에 지면서 건설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코스트코 건축 허가를 반려해 여러 차례 소송을 당했고, 심지어 손해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코스트코를 울산 북구에 건설하려고 한 2010년부터 2011년에 대형마트 때문에 동네 상권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법적 요건을 갖춰 건축 허가를 요청했지만, 너무도 명백하게 동네 상권을 피폐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며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울산시 행정심판위원회에서 직권으로 건축 허가했다. 윤종오는 당시 심경을 2013년 진보정치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소상인의 입장에서 풀려고 했다. 지자체 힘의 한계로 막아내지 못해 죄송하다. 소신 행정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단체장이 주민의 편에서 행정을 펼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돈이 지역 안에서 돌게 하기 위해선 대기업을 더 규제하고 영세자영업자가 물건을 지역 내에서 팔고 사 먹고 사주면서 순환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행정의 수장이 단순히 법적인 결제만 하는 게 아니라 주민의 삶을 두루 어루만져야 하는 책무가 있다.”

지난 2011년 코스트코 건설 허가를 거부해 소송을 당했던 윤종오 구청장이 '윤종오 구청장 구명, 지역상권 살리기 북구주민 대책위' 회원들과 함께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진보정치


건축허가를 받은 코스트코는 그를 직권남용으로 형사 고발했고,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형사재판의 경우 벌금 1000만 원으로 마무리됐지만, 코스트코는 민사재판을 계속 이어갔고, 윤종오는 2017년 대법원에서 3억 6천만 원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때 윤종오는 이미 북구청장 임기를 마치고 3년이나 지난 때였다. 윤종오 후임으로 북구청장에 오른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은 코스트코 측에 이자까지 붙여서 코스트코에 5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물어주고 전직 구청장인 윤종오에게 구상금을 청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버지 묘소와 아파트가 압류돼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그를 위해 울산 북구의 여러 시민단체가 대책위를 꾸려 대응에 나섰고, 결국 북구청도 1억 5천만 원만 받기로 합의했다. 남은 금액은 주민들의 모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코스트코와 소송전을 이어갈 당시 그에겐 위기가 닥쳤다. 2014년 총선을 1년 앞두고 박근혜 정권의 공안탄압 표적이 됐던 통합진보당은 내란 음모 조작 사건과 정당 해산 청구가 연이어 일어났다. 결국, 온갖 보수매체와 방송이 통합진보당을 공격했고, 윤종오는 북구청장 재선에 실패했다.

2016년 국회의원 당선되며
노동자 정치인으로 귀환했지만
당선과 동시에 닥친 공안탄압
4차례 압수수색 등
벌금형 선고 받고 의원직 상실


윤종오는 위기에 강하다. 2014년 재선에 실패하고, 그해 연말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했으며 코스트코와 민사소송으로 어려움이 컸지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울산 북구에서 구청장과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정의당 조승수 후보와 경선에서 승리한 뒤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며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결국, 윤종오는 3선 의원 출신인 새누리당 윤두환 후보를 상대로 득표율 61.49% 기록하며 압승했다.

하지만, 노동자 정치인 윤종오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거운동이 한창 막바지로 향하던 2016년 4월 7일 울산지방검찰청은 윤종오가 대표로 있던 마을공동체 동행 사무실을 압수수색에 나섰다. 당선 바로 다음 날엔 그의 선거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 했다. 총 4차례 압수수색을 진행해 윤종오와 선거사무장의 휴대전화 등을 압수해 갔다.

2016년 4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울산 북구 윤종오 국회의원 당선자에 대한 정치탄압 표적 수사 규탄 기자회견에서 윤종오 당선자가 검찰의 수사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청년연대, 한국진보연대 등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노동자 국회의원 공안탄압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응에 나섰고, 울산의 시민사회 등으로 구성된 ‘노동자 국회의원 윤종오 정치탄압 저지 울산시민 대책위’와 민주노총 울산본부 등도 노동자 정치인을 지켜야 한다며 호소에 나섰다. 하지만, 윤종오를 비롯해 12명의 선거 관계자 등은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함께 기소됐고, 결국 2018년 대법원에서 유사 선거사무실을 운영한 혐의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의원직 살싱 위기 속에도
노동자위한 의정활동과
탈핵과 신재생에너지 운동
2016 국회 우수 환경의원 선정


당선 직후부터 시작된 공안탄압으로 위기를 맞았던 그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의정활동에 힘을 쏟았다. 쉬운 해고 금지법, 직장폐쇄 제한법,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등을 앞장서 발의했다.

탈핵 운동에도 앞장섰다. 울산 북구의원 시절부터 그는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때부터 울산핵발전소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 1999년 8월 울산 신고리원전 건설 반대를 위해 경주, 대구, 대전, 과천 등을 거쳐 정부 청사까지 1200리길 행군을 하며 반대 투쟁에 나선 바 있다. 북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공공건물과 기업 등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는 등 신재생에너지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2016년 경주에 4.6의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하여 원전 문제가 부각되었던 터라 지진, 원전으로부터 안전한 북구 만들기 및 탈핵 활동에 집중했다. 시민단체 등과 함께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고, 이런 활동을 통해 ‘환경운동연합 2016 국회 우수 환경의원(탈핵 분야)’으로 선정됐다.

2016년 5월 31일 오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열린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원인규명과 대책촉구 기자회견에서 김종훈(왼쪽부터), 윤종오 국회의원들과 참석자들이 원인규명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중의소리

이런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건 윤종오가 ‘노동자 출신’ 정치인이 아니라, ‘노동자’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동자로 일하다 선거에 출마에 당선된 그는 공무 휴직을 받아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이후에도 울산시의원과 북구청장, 북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뒤에도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임기를 마치면 늘 노동 현장으로 복귀했다.

2014년 구청장 임기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하려 하자 안전행정부 공직자윤리위가 복귀를 불허하자 소송으로 맞서며 복귀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북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하다 공안탄압 논란을 불렀던 선거법 관련 판결로 의원직을 잃었을 때도 공직자윤리법(국회의원 등이 임기 후 곧바로 자신이 일하던 곳에 복직하면 회사 측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3년 유예 기간을 두게 되어 있음) 때문에 3년이 지나서 2020년 12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의장1부 현장으로 복귀했다.

6년여 만에 다시 돌아온 국회
운종오의 제1호 법안은
윤석열 정권이 거부한
노조법 2·3조 재추진


그는 의원직을 상실하며 자격정지 5년이 선고됐었다. 때문에, 5년 동안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당했다. 2022년 12월 자격정지가 끝난 그는 이듬해인 2023년 2월 진보당에 입당했다. 윤종오는 당시 “윤석열 검찰 정권은 공안몰이로 노동자를 탄압하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민생 파탄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며 국민을 검찰공포정치로 몰아넣고 있다”면서 노동자와 서민 생존권을 지키는 일에 나서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1년여가 지나 그는 울산 북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범야권이 단일화 논의를 거쳐 울산 북구 단일후보로 결정됐지만, 이 지역 현역의원이었던 민주당 이상헌 의원이 이 합의에 반발해 민주당을 탈당해 후보 단일화 경선을 제안했다. 윤종오는 이를 수락할 어떠한 의무도 없었지만, 승리를 위해 승부수를 두었다. 경선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지난 3월 23∼24일 진행된 여론조사를 통해 윤종오는 울산 북구 야권 단일후보가 됐고, 결국 득표율 55.0%로 국민의힘 박대동 후보를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으로 다시 돌아온 노동자 정치인 윤종오가 꿈꾸는 정치는 과연 무엇일까? 그가 진보당 기관지 너머와 인터뷰에서 밝힌 ‘국회에서 가장 먼저 추진하고 싶은 법안’에 그 힌트가 담겨 있다. 바로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다. 그는 인터뷰에서 “1호 법안은 윤석열 정권이 거부한 노조법 2·3조 재추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노조법 2·3조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노동조합 활동 보장을 위한 생명줄 같은 법안입니다. 노동자들이 주신 사명을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꼭 실현하겠습니다”라고 다짐을 전했다. 윤종오가 꿈꾸는 노동자 정치가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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