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경찰기자 수습을 한참 돌던 때 들은 농담 하나. 모 신문사 수습기자가 담당 선배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선배, 제가 특별한 걸 알아냈습니다. 이건 저만 알고 있는 단독입니다”라고 보고를 했단다. 내용을 쭉 들은 선배가 이렇게 다시 확인을 했다.
“이거 정말 너만 알고 있는 거야?” “예, 확실히 저만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 앞으로도 쭉 너만 알고 있어라. 죽을 때까지 너만 알고 있어야 해.” “·······”
보고 내용이 하도 허접해서 기사가 안 되는 걸 단독이랍시고 보고했더니 이런 재치 있는(?) 핀잔을 들었다는 이야기.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단독이라니, 얼마나 슬픈가? 웬만해서는 잘 웃지 않는 나도 당시 저 농담을 듣고 피식 웃을 뻔 했던 기억이 난다.
이 허접한 농담 비슷한 이야기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이 짓을 시현해 옛 추억을 상기시켜준다. 윤 대통령은 여당이 총선에 참패한 이후 16일에야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소감을 밝혔다. 나도 생중계로 봤는데, 어이없게도 그 소감에는 사과 한 마디 없었다.
문제는 소감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몇 시간 뒤에야 용산이 “사실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과 참모회의에서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언급한 것. 아니 그러니까, 생중계 때는 사과 안 하다가 비공개 회의에서 국민에게 사과를 했다는 거다.
사과가 비밀이냐? 너만 알고 있어야 할 단독이야? 감춰야 할 출생의 비밀이냐고? 국민에게 사과를 할 거면 생중계 중에 할 일이지 자기가 무슨 신비세력이라고 카메라 꺼진 뒤에 몰래 사과를 하고 자빠졌냐는 말이다.
사과는 고백이나 변명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신비세력의 수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에, 생중계 중에 그가 한 말만 귀에 담겠다. 카메라 꺼지고 네 시간 뒤에 사과를 했다는데 그걸 어찌 믿으란 말이냐?
그리고 나는 그가 생중계 때 했던 발언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진짜 사과를 할 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 사람은 평생 사과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나면 사과를 하기 전보다 욕을 더 먹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사과는 고백이나 변명이 아니다. 이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그 사과의 성패를 가른다.
언어학자인 에드윈 바티스텔라(Edwin L. Battistella)는 자신의 책 <공개 사과의 기술>에서 “자신한테만 100% 책임이 있는 건 아닌 경우가 많기에 누구나 억울함을 호소하고픈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자기 해명은 대체로 사과하는 이의 감정과 진정성을 온전히 전달하는 걸 방해하는 쪽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4.04.16. ⓒ뉴시스
이게 무슨 말이냐?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자기가 억울하다고 느낀다. 윤석열 대통령이 잘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잘하긴 개뿔, 진짜 잘 한 게 하나도 없지만) 잘 한 부분이 없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의 심리라는 거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사과를 할 때 이 억울함을 담는다. 형식은 사과인데 내용을 보면 책임을 회피하거나 줄이려는 문장이 꼭 들어간다. 이게 아니면 쌍방 잘못이라는 문장을 삽입한다. 한 마디로 깔끔하게 사과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토를 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바티스틸라에 따르면 이런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듣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사과를 한답시고 “나만 쓰레기야? 너는 잘못이 없어?” 이러고 있으면 듣는 사람은 그 구질구질함을 온 몸으로 느끼기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이런 구질구질함의 극치였다. 나는 잘못 없는데, 내가 가는 방향은 맞는데, 이런 토를 줄줄이 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효과 외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사과다.
진짜 사과를 하려면
윤석열 대통령의 ‘비밀리 사과’, 혹은 ‘너만 알고 있어라, 단독 사과’에 반대되는 좋은 사과의 예를 하나 소개하겠다. 이른바 ‘타이레놀 독극물 주입사건’이 벌어졌을 때 타이레놀 제조사인 존슨앤드존슨의 대처 방식이 그것이다.
1982년 9월 29일 미국 시카고에서 타이레놀을 복용한 7명의 주민이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FBI의 수사 결과 당시 누군가(범인이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가 소매 판매 단계에서 타이레놀에 독극물을 주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인이 워낙 널리 애용하는 약이었기에 미국은 공포에 빠졌다. 다행히 당국의 수사 결과 타이레놀 오염은 시카고에서만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존슨앤드존슨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할만한 일이었다. 실제 회사 변호사들은 “존슨앤드존슨은 책임이 없으니 한시름 놓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회사 경영진은 누구처럼 구질구질하게 토를 달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지 하루만인 30일, 그러니까 진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도 전인 상황에서 존슨앤드존슨은 즉각 광고를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병원과 약국에 타이레놀을 처방하지도, 판매하지도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범인 검거에 10만 달러의 현상금도 내걸었다.
타이레놀 생산은 당연히 즉시 중단됐다. 경찰 조사 결과 독극물에 오염된 타이레놀이 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10월 5일, 존슨앤드존슨은 이에 아랑곳 않고 북미지역 팔려나간 타이레놀 3,100만 병을 모조리 수거했다. 시가 1억 달러가 넘는 과감한 리콜 조치였다.
이 조치가 너무 과감했던 탓에 정부 관계자조차 “과잉 조치인 것 같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존슨앤드존슨의 방침은 확고했다. 당시 이 회사의 CEO였던 제임스 버크(James Burke)는 “회사의 이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안전”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태가 처음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자랑했던 타이레놀이 곧 몰락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회사의 진정성 있는 사과, 그 어떤 구질구질한 토를 달지 않는 과감한 조치로 타이레놀의 신뢰는 곧바로 회복됐다.
사건 이후 회사 간부들이 브랜드 가치가 손상된 타이레놀의 생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했을 때 버크가 남긴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타이레놀의 명예는 더 안전한 타이레놀로 살려내야 한다.” 이 사건 이후 버크는 2003년 포춘지가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CEO’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과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사과에 진정성이 새겨지면 그 사과는 전화위복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진정성은커녕, ‘비밀리 사과’, ‘너만 알고 있어라, 단독 사과’ 따위나 시전하고 자빠졌다. 설마 그 사과가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바랐던 거냐?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머리가 빡대가리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