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에 담긴 ‘선구제 후회수’ 방안에 필요한 재정 규모를 두고 정부 추산 결과와 전문가 추산 결과가 큰 차이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최대 5,80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지만 정부는 최대 4조원에 달하는 재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양측 차이가 무려 7배에 달한다. 큰 차이가 난 이유를 따라가다보면, 서글픔이 밀려온다. 정부와 여당에게 재정은 과연 누굴 위한 돈일까.
‘최우선변제금’만큼은 구제해주자는 취지인데... 회수 금액 고려 없이 “3조~4조원 들여야 한다”는 국토부
지난 24일 서울 강남구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지역본부에서 국토연구원 주최로 열린 ‘전세사기 피해지원의 성과 및 과제 토론회’에 국토교통부를 대표해 참석한 이장원 국토부 전세사기피해자지원단 피해지원총괄과장은 ‘선구제 후회수’ 방안에 대해 대규모 재정 소요를 이유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선구제 후회수’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공공기관이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우선 사들여 보증금 일부를 피해자들에게 돌려준 뒤 정부가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거나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매각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금을 회수하자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특별법 개정안에는 전세사기 피해자가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공공 매입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채권 매입기관은 공정한 가치 평가를 거쳐 채권을 매입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채권 매입 가격은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최우선변제를 받을 보증금의 비율 이상으로 했다. 피해자들이 최우선변제금만큼은 돌려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실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물론 특별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 중인 더불어민주당도 ‘선구제 후회수’를 통해 보증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한 피해자들에게 최우선변제금만큼이라도 지원하자고 주장해 왔다.
이날 국토부는 피해자들의 전체 보증금 규모가 5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특별법 일몰 기한인 내년 5월 말까지 전세사기 피해자 3만6천명가량이 나올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 피해자 평균 보증금으로 추산한 1억4천만원을 곱한 수치다. 그리고 이 5조원 규모의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사들이는데 3~4조원가량이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상 국토부는 ‘선구제 후회수’ 방안 이행에 3조~4조원가량의가량의 재정이 투입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정부 추산엔 빠진 게 있다. 재원을 투입해 사들인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통해 향후 정부가 회수할 금액이다. ‘선구제’에 필요한 실질적인 재정 투입 규모를 산출하기 위해선 채권을 사들인 금액(3조~4조원)에서 추후 정부가 경매 등을 통해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을 빼야 한다.
예컨대 정부가 4조원의 재원을 투입해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매입했더라도, 경공매를 통해 3조원을 회수한다면 실제 투입된 정부 재정은 1조원이 된다. 하지만 정부가 밝힌 3조~4조원은 ‘추후 회수 금액’을 배제된 숫자다.
정부는 매입한 채권 대부분을 회수할 수 없다고 본 듯하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국토부 관계자는 “(피해 주택이) 경매에 나와서 얼마에 낙찰이 될지 예측 불가능하며, 가압류 등 채권관계를 다 파악하는 것도 어렵다”면서 “회수도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설명과 달리 추후 회수할 수 있는 비용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토부 피해자지원위원회가 인정한 피해자 수는 이달 18일 기준 1만5,433명이다. 전세사기 시민사회대책위에 따르면 이 중 20%가량은 최우선변제 대상이며. 30%는 선순위 임차인이다. 즉 피해자의 50% 정도는 최우선변제금만큼 또는 보증금의 상당부분을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의 재정 소요 추정 관려 피해가구 실태조사 결과 발표 ⓒ뉴스1
“후순위에 최우선변제 대상 아닌 피해자만” ... 전문가들, 최대 5,850억원 예상
반면 전문가들의 분석은 정부와 달랐다. 지난 23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는 전문가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의 선구제 후회수 방안’ 기자설명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과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피해자 선구제를 위해 필요한 재원이 최대 5,850억원 정도라는 분석을 내놨다. 한국도시연구소와 주거네트워크가 진행한 실태조사를 토대로 산출한 결과다. 정부 추산의 1/7 수준이다.
계산 방식도 달랐다. 정부는 매입해야 할 채권의 규모만 계산했다. 이 방식대로라면 매입한 채권을 통해 추후 회수할 수 있는 금액까지 계산해 빼야 하는 게 맞지만, 정부는 가능성이 작다며 이를 배제했다. 그렇게 정부가 추산한 필요 재정이 4조원이다.
전문가들은 실태조사를 통해 실제 선구제해야 할 ‘피해자 수’와 ‘1인당 지원 금액’을 추산해 필요 재원을 산출했다.
우선 전문가들은 올해 연말까지 발생할 전세사기 피해자 규모를 2만5천~3만명으로 전망했다. 다만 이들 전부가 ‘선구제’ 대상은 아니다. 이들 중 후순위이면서 최우선변제 대상도 아니어서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이들이 선구제 대상이다.
통상 사고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면 변제 우선순위에 따라 배당금이 분배되는 데, 먼저 선순위 채권자들에게 배당하고 이후 후순위 채권자에게 배당하는 식이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전세보증금보다 선순위 채권이 존재한다면 경매 매각대금에서 선순위 채권을 먼저 주고 난 후 남은 돈으로 보증금을 돌려주는 식이다. 따라서 선순위 채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돌려받을 수 있는 보증금도 적어진다. 만약 선순위 채권이 경매 매각대금보다 많다면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
세입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최우선변제금은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현재 전세보증금이 근저당 설정 시점의 ‘소액보증금 기준’ 이하여야만 받을 수 있다. 계약 당시 전세보증금이 기준보다 낮았더라도, 계약을 갱신하면서 소액보증금 범위를 넘어가면 최우선변제금을 받을 수 없다. 최우선변제금은 보증금의 30% 수준으로 책정된다.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는 소액보증금 기준은 2~3년마다 상향된다. 2023년 2월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개정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다수 발생한 인천의 경우 소액보증금 기준은 1억3천만원에서 1억4,500만원으로 상향됐다. 이때 최우선변제금 상한도 4,300만원에서 4,800만원으로 올랐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후순위이면서 최우선변제 대상이 아닌 피해자는 48.6%로 전체 피해자의 절반 수준으로 집계됐다. 즉 전체 피해자를 3만명 규모로 봤을 때 실제 ‘선구제’가 필요한 피해자 수는 1만5천명 정도인 셈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보증금 규모를 파악 한 결과 △1억 미만이 45.7% △1억원 이상~1억5천만원 미만(27.6%) △2억원 이상 16.8% △1억5천만원 이상~2억원 미만 9.9%로 조사됐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이 추산한 평균 전세보증금은 1억2,711만원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통상적인 최우선변제금 비율 30%를 적용했다.
전문가들은 ▲전세사기 피해자 최대 3만명 ▲최우선변제 대상이 아닌 후순위 피해자 비율(통계상 48.6%) 50% ▲평균 피해보증금(통계상 1억2,711만원) 1억3천만원 ▲최우선 변제금 비율 30% 등의 통계수치를 통해 필요 재원을 산출했다. 해당 수치는 오차를 감안해 기존 통계치보다 소폭 높게 책정해 여유를 두기도 했다.
그 결과 ‘선구제 후회수’에 필요한 정부 재정은 최대 5,850억원(3만명x50%x1억3천만원x30%)으로 산출됐다.
정부가 추산한 ‘4조원’과 전문가 분석인 ‘5,850억원’을 두고 어떤 결과가 합리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다.
누구의 분석이 합리적인지를 떠나 ‘전세사기 피해자의 손해를 세금으로 보전하는 게 맞느냐’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하지만 전세사기는 보이피싱 등과 같은 일반적인 사기와 다르다. 법에 허점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이 수십, 수백 채에 달하는 집을 사들였다. 피해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했지만, 결과는 전세사기였다.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로 꽃다운 청년 5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회적 재난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들의 고통은 커진다. 지금도 켜켜이 쌓여가는 중이다. 한 순간에 전재산이 날아갔다.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지원을 하자는 주장이, 그리도 못마땅한 것일까. 4조원이면 안될 일이고, 5천억원이면 받아 들일만 한 숫자인가. 한국 사회는 정말 그리 모진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