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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삶과 문학] “새로운 존재가 태어날 것이다”

J.M.쿳시의 소설 「추락」

j.m.쿳시의 소설 「추락」 ⓒ동아일보사

수원 작은 도서관 ‘책고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작품 읽기 강좌’를 시작했다. 193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대하소설 「티보네 사람들」에 이어 2003년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호주 작가 존 맥스웰 쿳시의 「추락 DISGRACE」을 읽었다.

두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1, 2차 세계대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랜 식민 역사와 1948년 남아공 백인 정권에 의해 법률적으로 공식화된 극단적인 유색인종 분리,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 등을 살펴보았다. 전쟁과 침략, 파괴와 폭력과 죽음과 폐허의 배후에는 예외 없이 제국의 식민주의가 있다. 지속적인 제국 간 식민지배 쟁탈전은 인류에 가장 큰 비극과 상처를 남겼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사실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어떤 새로운 사조로도 외면할 수 없는 문학의 주제가 되었다.

J.M. 쿳시의 소설 「추락」은 1994년, 남아프리카 민족회의 지도자이며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주도한 넬슨 만델라가 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시기, 사회 정치적 전환기에 있던 남아공 사회를 무대로 전개된다. 백인 정권이 종식되었으나 수백 년 얼룩진 식민주의, 흑백 간의 갈등은 위기와 적대감에 기반한 폭력으로 분출되고, 소설은 그러한 불안정한 변화의 시절을 살아가는 백인 남성 대학교수 데이비드 루리와 그의 딸 루시가 겪는 사건, 심리적 갈등, 서구의 시선으로 본 '합리적 선택'에 위배 되는 또 다른 선택, 두 아프리카너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개인적 속죄의 의미 등을 매우 핍진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J.M.쿳시의 소설 ‘추락’을 원작으로 2008년 호주에서 만든 영화 속 장면. 스티브 제이콥스가 감독을 맡았고, 존 말코비치, 제시카 헤인즈가 출연했다. ⓒ스틸컷

오십 대 중반 이혼남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케이프타운의 대학에서 위즈워드, 바이런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를 강의하고, 성매매 여성들에게서 성적 욕망을 채우며, 백인 남성 지식인이라는 우월한 위치의 건조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살아간다. 딸 루시는 코뮌 공동체 일원으로 동부 케이프 시골 마을 흑인거주지역으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동물을 돌보며 전통적인 흑인사회에 정착해가는 독립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루리 교수는 여학생 제자 아이삭스 멜라니에게 마음을 빼앗겨 충동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그와의 성 추문으로 교수, 학자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모두 잃는 수치(disgrace)를 겪는다.

농장 일을 하며 시골 농부로 살아가는 루시의 일상은 평온하고 만족스럽다. 교수직을 잃은 데이비드 루리는 케이프타운을 떠나 루시의 농장에 머물며 개들을 돌보고 이웃 여성 베브 쇼가 운영하는 동물보호소 일을 돕는 등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런 그들의 일상을 추락하게 만드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세 명의 낯선 흑인 남성이 루시의 오두막에 침입해 아버지 루리를 감금하고 딸 루시를 강간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인데, 이 ‘낯선 침입자들’은 루리의 몸에 에탄올을 뿌리고 불을 붙이거나, 우리에 갇힌 개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잔인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루시는 그녀의 몸이 짓눌리는 치욕의 순간 그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명백한 적대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라진 범죄자들은 붙잡히지 않고, 그들 중 한 명인 흑인 소년은 가까운 이웃 페트루스의 친척으로 버젓이 루시의 오두막 근처에서 살고 있다. 루리는 딸 루시가 그들의 거주지역인 농장을 떠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강간범들의 범죄로 임신까지 하게 된 백인 여성 루시는, '그녀 안의 새로운 존재'를 포기하지도 그들을 떠나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내와 가족이 있는 흑인 남성 페트루스의 여자가 되어 태어날 아이와 함께 그들의 공동체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 결심을 한다. 아버지인 백인 남성 루리를 비롯해 ‘합리적’ 관점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선택이 깊고 서늘한 이유는, 그것이 가부장적 세계로의 체념적 투항이 아닌 대속의 의미, 소설 속 그녀의 말처럼, 수백 년 아프리카 땅을 지배하며 그들 스스로 잃었던 어떤 '명예'의 문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존 쿳시의 다른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야만인’, 제국의 경찰들이 기다리는, 그들이 붙잡아 고문하고 매달아 죽이는 미개인들은 누구인가, ‘야만인’이란 누구를 향한 말인가, 질문하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백인 교수 루리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 ‘DISGRACE’, 그의 수치, 불명예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누구의 것인가, 다시 질문하게 된다.

데이비드 루리는 여전히 들에서,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꽃을 재배하며 ‘태고적 일’을 하는 농부, 그가 죽은 후에도 여기에 있을 딸 루시를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한다.

‘그녀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견고하고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존재의 선은 이어질 것이다. 그가 거기서 맡았던 역할이 속절없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잊혀질 때까지, 그 선은 이어질 것이다.’

그가 ‘거기서 맡았던’ 역할이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돌보던 ‘기한이 다 된 존재’, 불구가 된 개의 안락사를 미루다가 결국 살리는 것을 ‘단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지식인 남성이었던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무엇을 단념한 것인가. 그들은 무엇을 단념해야 하나.


J.M.쿳시(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우스터에서 태어난 네덜란드계 백인 작가 쿳시는 아프리칸스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썼고, 1983년 「마이클 K」, 1999년 「추락」으로 두 번의 부커상을 받았다. 주로 제국주의, 식민주의, 권력. 성, 인종 등의 문제를 작품에 담아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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