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정일 칼럼] 트럼피즘의 근원과 부상

지난 4월 19일 1시 20분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 의혹 사건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 중인 뉴욕 맨해튼형사법원 맞은편 공원에서 한 남성이 미리 준비한 전단을 뿌리고 분신 사망했다. 이 남성은 트럼프가 현 정부의 음모에 걸린 것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성추문 입막음’ 사건은 트럼프가 2016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인물 여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와 관계를 가진 후, 이 일에 함구하는 대가로 13만달러를 주면서 그 비용과 관련된 회사 기록을 조작했다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이 사건은 물론이고 현재 그가 받고 있는 더한 형사상 중범 혐의조차도, 그의 지지자들을 돌아서게 하지 못한다.

2016년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는 흑인·여성·빈민·이주민·이슬람·성소수자에 대한 시민적 권리 확장이 미국을 약하게 만드는 특권이라고 공격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공약은 경악스러웠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국수주의적인 공약이 악재로 작용하기는커녕 당선 동력이 되었다. 이 사태는 유대인 배척과 게르만민족주의를 내걸고서 의회를 장악하고 수상 자리를 꿰찼던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만 비교할 수 있다.

미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각) 뉴욕의 맨해튼 형사법원에 출석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2024.04.16. ⓒ뉴시스

아사히신문사 뉴욕 특파원 가나리 류이치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돌풍을 일으킨 러스트벨트(rust belt: 오대호 주변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심상치 않은 조짐을 선거 약 1년 전인 2015년 12월부터 이듬해 선거일까지 밀착 취재했다. 그 결과물인『르포 트럼프 왕국』(AK커뮤니케이션즈,2017)은 “어째서 트럼프인가”라는 부제를 가졌다. 백인 일색이었던 러스트벨트 주민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이유는 나프타(NAFTA: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였다. 예전에는 민주당 지지자였다는 58세의 실직자 리안 페이버(58세)의 말이다. “전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에어컨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봤어요. 조립 라인이 분해되어 문밖으로 운반되는 걸. 멕시코로 이전한다는 결정이 나면서 실직했어요. 딱 북미자유무역협정 직후예요.”(169~170쪽) 러스트벨트의 주민들은 모두 페이버와 같이 말했다. 나프타 관련법은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애를 써서 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의 『야망계급론』(오월의봄,2024)을 보면 나프타는 러스트벨트만 몰락시키지 않았다. “1994년 나프타에 의해 수입관세가 완화되고,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때까지 지난 20년간 미국 의류 산업은 멕시코, 인도, 중국으로 일자리가 이동하면서 충격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1991년 미국에서 판매된 전체 의류 가운데 미국산 제품은 56.2퍼센트를 차지했지만, 2012년에 이르면 그 수치가 고작 2.5퍼센트로 감소했다. 미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공장이 사라지고 도시의 일자리 기반 자체가 실종되면서 위기가 발생해 항구적인 ‘실업 상태’가 일어났다.”(230쪽) 트럼프는 나프타 개정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트럼프 현상’은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최근에 나온 차태서의  『30년의 위기』(성균관대학교출판부,2024)는 트럼프 현상을 러스트벨트에서 일어난 국지적이고 일회적 현상이 아니라, 잭슨주의(Jacksonianism)에서 유래한 미국의 사상적 자원으로 분석한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이름을 딴 이 이단적 흐름은 건국기 프론티어의 개척민들에게서 유래했으며, 반계몽주의적·종교근본주의적·쇼비니즘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낸다. 즉, 자유주의적·세속적·세계주의적 특성을 지녔던 동부의 지배계층과 달리, 서부의 ‘민중들’은 미국을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로 이루어진 배타적 인종-종교 공동체로 상상해왔다.”(58쪽)

배타적 잭슨주의의 사상적 전통 위에 있는 트럼피즘
트럼프의 부상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미국’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미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잭슨주의자들은 ‘진짜 미국인’과 ‘가짜 미국인’을 엄격히 가르고 이들을 공적 정치 영역에서 배제하고자 하는데, 트럼프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혐오를 부탁했던 흑인·(복지 정책에 의존한) 빈민·이주민·이슬람·성소수자들이 바로 가짜 미국인들이다.

트럼프의 부상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미국’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미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여태껏 미국이 하나인 것처럼 보였던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비대해진 미국의 자유주의적-국제주의적 이상주의가 잭슨주의와 잭슨주의의 외교적 판본인 ‘제퍼슨주의 전통’(Jeffersonian tradition: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주장에 따른 고립주의 외교)을 말소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자유국제주의적 이상주의가 무시해온 잭슨주의와 외교상의 제퍼슨주의 전통을 복원하려고 한다. 트럼프는 “세계평화를 위한 민주주의 증진이라는 지배적인 자유국제주의 노선 일반, 그리고 그것의 군사주의적 버전인 네오콘의 정권 교체 독트린”(68쪽)을 어리석음과 오만의 산물로 비난한다. 국제연합(UN)도, 나토(NATO)도, 한미동맹도, 모두 (‘진짜’ 미국적이지 않은) 비미국적인 것일 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지더라도 가만 놔둘 것이라는 발언도 그래서 나왔다.

2018년 11월 28일, 오하이오주 워렌의 린츠 타운라인가의 눈 덮인 집 마당에 성조기 깃발이 나부낀다. ⓒ뉴시스


두 가지 원인이 트럼피즘이라는 이름의 잭슨주의를 불러냈다. 하나는 『르포 트럼프 왕국』에서 본 미국의 민중들이, 패권국가 미국이 세계에 전파하고 유지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초국적·지구주의적 엘리트의 이익을 반영한 헤게모니 담론”(32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직과 몰락을 통해 몸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에서 잭슨주의는 경제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극성을 부렸는데, 이번에는 미국이 주도했던 세계화가 사달을 냈다. 또 다른 원인은 1991년 소비에트 해체 이후 근 30년 동안 단극체제를 구가한 미국의 지위가 중국 등 외부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부친 미국은 군사력과 함께 자국을 패권국으로 만들어준 이념적 통솔력(소프트 파워)을 내버리고, 군사·외교·경제 등의 분야에서 폐쇄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내고, 그 기세를 몰아오는 11월 5일에 있을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해도 트럼피즘은 죽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변종을 낳으며 끈질기게 살아 있듯이, 트럼피즘은 더욱 강하게 무장한 백인-기독교 세력의 극우 포퓰리즘으로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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