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윤석열의 시간, 세월호와 백남기 사이 어디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 기념탑에서 참배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2024.04.19. ⓒ뉴시스

현존하는 많은 제도나 문화가 그렇듯 정권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어떻게 저런 일을 벌이고 자리보전이 될까 싶어도 어떻게든 피하고 넘기고 뭉개며 시간을 보낸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박근혜 정권이 유지되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참사에도 대통령은 행방이 묘연했고, 수면 위의 거대한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데 국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사이 정부는 조명탄을 쏘며 야간 수색작업 중이라고 유족들을 속였고, 에어포켓 운운하며 생존 가능성을 부풀렸다.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권력 정당성마저 의심받던 대통령이 책임을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때까지 2년 반 넘게 정권은 유지됐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과정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2016년 9월 25일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병원은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라고 했고, 정부는 경찰을 병원에 투입해 강제부검을 시도했다. 사실상 군사독재 시절의 시신 탈취와 같았다. 서울대병원에 방패를 든 경찰력이 투입되고 맨몸의 활동가들이 스크럼을 짠 것을 본 치떨리던 순간이 생생하다. 폭력살인을 감추기 위해 억울한 죽음마저 다시 압살하는 행태였다. 유족은 물론 야당과 여론도 정권의 만행을 비판했다. 서울대병원은 고인을 놓고 24시간 대치하는 전쟁터가 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권의 퇴행과 폭주는 국정교과서, ‘위안부’ 밀실 합의, 양대지침을 통한 노동자 탄압 등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남기 농민 죽음 이후 서울대병원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며, 정말 이제는 오래 가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2월 탄핵안이 가결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노동운동을 배경으로 한 진보정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오면서 정권을 교체하는 방식은 선거로 굳어졌다. 정권 타도나 퇴진 구호가 종종 거리에서 울리지만, 하야를 거부하는 대통령을 퇴임시키는 제도적 방식은 탄핵이 거의 유일하다. 박근혜 이전에는 탄핵에 의문부호가 달려 있었다. 국회 의석 2/3라는 문턱도 높았고, 시중 여론보다 보수적인 헌법재판소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노무현 탄핵 기각 이후의 후폭풍도 기성 정치권을 움츠리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누적된 실정과 국정농단은 이를 가능케 했다.

세월호 참사도, 백남기 농민 사건도 모두 죽음과 연결된 사안이었다. 정권은 죽음으로 드러난 무능, 무책임, 그리고 폭력을 감추기 위해 이성을 잃고 무리수를 뒀다. 유족을 공격하거나 사인을 조작하려는 반인륜적 행위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졌다. 국정농단이라는 스모킹 건이 있었지만, 탄핵을 이룬 압도적 군중과 여론의 바탕에는 죽음마저 악용하는 정권에 대한 본질적 분노와 의문이 있었다. 이는 진보, 보수를 막론했다.

채상병 특검법이 가결되자 대통령실은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고 맹비난했고, 여당은 이를 앵무새처럼 받아 외고 있다. 그러나 채상병의 죽음을 누가 은폐하고 악용하려 하는지, 여론은 일관된 판단을 보여줬다. 총선 결과로도 재확인됐다. 대통령과 주변만 애써 모른 척, 못 본 척 할 뿐이다.

한국은 대다수 남성이 병역의무를 가진 국가다. 자신이든 주변이든 군대와 관련 있는 이들이 있다. 명령에 따라 맨몸으로 수색작업을 하던 젊은이가 희생됐는데 대통령의 권력이 측근 보호에 쓰였다면, 국군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의 자격과 직결된다. 1년이 다 됐는데 ‘몇 달 더 수사를 기다려보라’는 소리로 뭉갤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도, 여당도,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이제 죽음을 은폐하고 악용하는 편에 설 것인지 아닌지 결단해야 한다.

역사의 시간은 때론 한정 없이 늦다 결정적인 시점엔 바람처럼 지나간다. 뒤늦게 죄송하다느니, 몰랐다느니 하는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1일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될 예정이다. 어쩌면 윤석열 대통령의 시간은 세월호 참사를 한참 지나 백남기 농민 사건마저 지나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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