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매일 붓을 들고 캔버스를 통과해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작가 허윤희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날마다 그린 태양...‘여는 바당’

허윤희 작가가 범섬이 보이는 바다에서 일출 그림을 그린 뒤 찍은 사진. 2024.03.16. ⓒ허윤희 작가 페이스북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무수히 쪼개지는 바다 너머 저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먼 구름 사이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충만함과 희망을 느꼈다. 그 힘으로 인생의 변화를 줄 수 있었다.

허윤희 작가가 제주도로 내려가 태양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길 듣는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허 작가는 지난해 10월부터 매일 새벽 ‘범섬’(제주 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이 보이는 바닷가에 나가 떠오르는 태양과 바다를 그렸다. 그 그림을 모은 전시 ‘여는 바당’이 예술공간 수애뇨339(서울 종로구 평창길 339)에서 5월 17일부터 열렸다.

예술공간 '수애뇨339'에서 허윤희 작가의 개인전 '여는 바당'이 2024년 5월 17일부터 6월 12일까지 열린다. ⓒ수애뇨339 홈페이지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우리는 평소 잊고 살다가도 장엄한 일출을 볼 때면 매번 그 충만함에 도취된다. 이 지구 생태계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 그 별빛이 없으면 존재하기 힘든 식물, 그 식물 또는 식물을 먹은 동물로 생존하는 게 우리 인간이라는 점을 보면, 우리가 어제와 오늘 먹은 한 줌의 양식은 사실 태양인 셈이다. 식물이 태양의 빛을 먹기 좋게 잘 빚어준.

생계를 위해 18년간 다녔던 대학 강사직을 그만두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주로 이주한 허 작가는, 날마다 일출을 보러 바닷가로 나갔다.

당시 심정을 기록한 작가의 글은 다음과 같다.

“새벽 바다 위로 아침놀이 아름답게 물들고 태양이 떠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며 ‘우주 속에 내가 살아있구나!’, 내가 이 땅 위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마음속에도 햇살이 반짝 빛났다. 날마다 일출을 보러 바닷가로 나갔다. 우주는 내 눈앞에서 장엄한 탄생의 순간을 보여 주었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 햇살이 사방으로 비치고 우주가 태양을 낳았다. 그 빛과 색채의 향연은 황홀하여서 넋이 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아침을 열었다. 그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아침마다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작가는 범섬이 보이는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날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재료로. 그것은 “간절함”이자 “수행”이었고, “기도”이기도 했다. “날마다 정성을 다할 때 예술은 진짜가 되고,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도 있었다.

겨울이 오고, 거친 바닷바람에 도무지 캔버스를 고정시킬 수 없거나 텐트조차 칠 수 없을 때도 날씨와 사투를 벌이며 장엄한 일출의 순간을 그렸다. 바람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리기를 반복하며.

이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고, 그림으로 남겼다. 전시 공간에 설치된 텐트에서 거친 바닷바람과 사투를 벌이는 작가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매일 지켜본 한 마을사람은 마음이 동했는지 작가에게 건물 옥상을 흔쾌히 내어주기도 했다. 그때 작가는, “아침마다 일출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내 예술을 응원하며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기뻤다”고 지난 4월 6일 페이스북에 썼다.

허윤희 작가는 지난해 10월부터 매일 일출 1시간 전 캄캄한 때에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 나와 일출을 그렸다. 그러자 "아침마다 일출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 주민은 작가를 안다면서 건물 옥상을 내어주기도 했다. ⓒ허윤희 작가 페이스북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하늘과 바다를 그리는데, 그 모습은 날마다 달랐다.

추후에 아쉬운 부분을 고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그린 그림에 “생생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그린 그림에는 “새벽 공기의 신선함”, “빛나는 아침 햇살”, “바닷바람의 내음”, “파도 소리”가 배어있었고, 붓질마다 “그 순간의 망설임과 결단”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 생생함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다.

지난 19일 전시장에서 만난 허 작가는 말했다. “제주도 참 좋다!” 지난 2021년 제주에서 만났을 때도 이 말을 했고, 허 작가가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난해 여름에 만났을 때도 이 말을 했는데, 올해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사는 내게는 참 지독한 말이다. 제주에 대한 그리움, 해마다 바뀌는 제주의 자연환경이 복구 불가능의 상태가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듣기가 참 좋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이마를 스칠 때, 나는 붓을 들고 캔버스를 통과해 먼 우주로 여행을 간다”는 그의 전시 서문에서도 읽히듯, 그 말에 충만함이 느껴져서일까.

예술공간 '수애뇨339'에서 허윤희 작가의 개인전 '여는 바당'이 2024년 5월 17일부터 6월 12일까지 열린다. ⓒ민중의소리

예술공간 '수애뇨339'에서 허윤희 작가의 개인전 '여는 바당'이 2024년 5월 17일부터 6월 12일까지 열린다. ⓒ민중의소리

미술작가 허윤희는 이화여자대학교와 독일 브레멘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는 ‘윤희그림’(1996년)을 시작으로 자연과 조우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성찰을 기록해 왔다.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재료와 주제 선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수많은 목탄 드로잉과 사라지는 거대한 목탄 벽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자작시 발표, 벽화 퍼포먼스 외에도 멸종식물 연구 등 다양한 활동과 함께 생명의 지속적인 기호작용을 작품에 구현했다.

허윤희 작가는 수애뇨339, 디스위켄드룸, 갤러리밈, 소마미술관, 사루비아다방, 인사미술공간 등 국내 미술공간에서 초대받아 개인전을 개최했다. 독일 갤러리데스베스텐스, 쿨투어팔라스트 베딩 인터내셔널 등 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재난과 치유’, 같은 해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린 ‘푸른 유리구슬 소리’, 2007년 독일 카셀에서의 ‘도큐멘타12-매거진’, 2016년 뉴욕 드로잉센터에서의 ‘더 버텀 라인’ 등 국내외 기획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드로잉센터 외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프랑스 아카데미 갈랑청, 일본 이와미 군청 등에 소장돼 있다.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2008년부터 10여 년 동안 진행한 ‘나뭇잎 일기’는 국립세종수목원 등에서 전시하고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참고 민중의소리 기사 : [만민보] 순간 속에 영원함, 허윤희 작가의 흔적)

수애뇨339에서의 허윤희 작가의 개인전은 지난 2020년 7~8월 열린 ‘사라져 가다’ 이후 두 번째다. 이번 전시는 6월 12일까지다.

허윤희 작가가 범섬이 보이는 바다에서 일출 그림을 그린 뒤 찍은 사진. 2024.03.16. ⓒ허윤희 작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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