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주제는 어떻게 노래해야 할까. 전국오월창작가요제나 인천평화창작가요제처럼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창작곡 경연대회 심사를 하다보면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출품곡의 수준이 높아진 지는 오래다. 실용음악과가 많고, 음악을 다양하게 듣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주도 대부분 완벽하다. 하지만 그 중 마음을 울리는 곡은 드물다. 음악의 기술적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5.18, 민주주의, 평화 같은 주제에 대해 마음을 울리는 가사를 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인들이 사회에 무관심해서는 아니다. 민중가요 진영 밖의 음악인들도 세상을 노래하고 곧잘 노래로 연대하는 시대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경연대회에서 좀처럼 좋은 노랫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은 소리로 채워지는 예술이지만, 가사 또한 음악의 일부라는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음악인들 중에는 좋은 멜로디, 근사한 사운드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남다르며 깊이 있는 노랫말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음악인이 많은 반면, 노랫말의 역할과 미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음악인도 적지 않은 현실이다. 대중음악 관련 교육 기관에서 노랫말에 대해 교육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다. 이처럼 노랫말이 사운드에 밀리면 좋은 노랫말이 나오기 어렵다.
좋은 노랫말을 쓰려면 충분히 알고 깊이 느끼고 다양하게 고민해야 한다. 좋은 노랫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5.18, 민주주의, 평화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물론 요즘에는 다들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5.18을 예로 들면 ‘1980년 5월 전두환 군부세력이 광주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래서 가슴 아픈 사건이다’ 정도의 인식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곡을 만들 수 없다. 많이 안다고 좋은 곡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창작자의 가슴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좋은 곡을 써내기 어렵다. 그래야 남다르게 쓸 수 있고,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가령 5.18을 주제로 곡을 쓰려면 5.18의 전개 과정을 알아야 한다. 5.18에 참여했던 이들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한 번은 광주 망월동 묘역과 구 도청 앞 광장을 걸어봐야 한다. 전일빌딩에 박힌 총탄 자국을 살펴야 한다. 광주에 오지 못하더라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오월의 사회과학’, ‘소년이 온다’ 정도는 읽어봐야 한다. 민주주의,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가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가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평화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찾아온다. 그런데 준비가 부실하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리 없다. 관념적인 이야기,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음악은 소리언어의 예술인 동시에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음악이 인문학, 사회과학과 만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고 인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인간의 다양함과 복잡함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사랑은 단순히 끌리고 보고 싶은 감정이라고만 이해한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대해 감동적인 노랫말을 쓸 수 있겠는가. 좋은 작품을 쓰는 예술가들이 다른 예술작품을 계속 탐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밥 딜런은 가사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 수없이 드나들며 신문을 읽곤 했다. 그의 노래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5.18, 민주주의, 평화 같은 가치가 아무리 숭고해도 그 가치를 전적으로 칭송해버리면 좋은 가사가 되기 어려운데, 정답을 정해놓고 이야기하는 가사가 너무 많다. 예술은 맞는 얘기를 반복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노래는 도덕교과서가 아니다. 용비어천가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예술은 맞는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공감하게 하기 위해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올바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도전이다. 그러려면 예술가는 아무리 숭고한 가치에도 압도되면 곤란하다. 예술가는 만고의 진리에도 의문을 가져야 하고, 모든 권위에 맞서야 한다. 익숙해진 상식과 가치를 흔들어야 하고, 엄숙하고 근엄한 태도를 거부해야 한다. 예술은 정답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줄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설득력은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거나 친숙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나온다. 그런데 꽃, 내일, 촛불, 희망 같은 상투적인 단어만 사용하는 노래에 어떻게 개성과 생명력이 피어나겠는가.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만의 언어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삶으로 5.18, 민주주의, 평화를 받아들이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5.18, 민주주의,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 생생한 표현이 나올 수 없다. 추상적인 이야기, 클리셰한 표현밖에 나열하지 못한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바로 자신의 체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경험한 5.18을 노래해야 한다. 자신이 세상의 불의를 만나 분노한 경험을 써내야 한다. 자신이 꿈꾸는 연대와 평화를 드러내야 한다.
사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누구도 세상과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노래로 써낼 줄 모르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노래해도 된다고 배우지 않았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그렇게 곡을 만들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창작물을 보고 감동받은 경험도 적다. 거창하고 아름다운 단어만 나열하고, 대부분의 곡이 비슷해지는 이유다. 끝내 남다른 가사, 생생한 가사, 깊이 있는 가사가 나오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예술은 은유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거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예술 작품은 은유만이 아니라 직설에서도 나온다. 예술 방법론의 위계를 정하면 안된다. 감동은 아름다움에서만 찾아오지 않는다. 좋은 노래는 예쁜 노래말의 집합이 아니다. 노랫말이 될 수 있는 단어와 노랫말이 될 수 없는 단어가 나누어져 있진 않다. 이미 50년 전에 김민기는 "구둣방 할아범 벌써 일어나 일판 벌려 놓았네"라고 썼다. 세상에는 민중가요의 예술성이 낮다고 무시하는 이들이 은근히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흩어지면 죽는다 /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라고 노래한 ‘파업가’ 가사의 위력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랑의 노래 ‘환란의 세대’가 독보적인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죽어버리자"라는 생활 언어로 절망을 표현해낸 솔직함과 과감함에 있다.
좋은 노랫말을 써내려면 100대 명반이나 히트곡 순위를 따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집과 소설을 읽으면서 문자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난해한 표현만 추종해서는 곤란하다. 생활 언어로 써낸 글을 읽고, 보통사람들의 말로 노랫말을 써볼 필요가 있다. 감동은 구체성에서 나온다. 예전 민중가요 진영 음악인들이 괜히 노동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노랫말을 쓴 게 아니다. 고 신경림 시인도 장돌뱅이, 농투사니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언어를 찾아냈다.
음악가는 음악과 소리로 감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 음악과 소리는 음악가의 이야기다. 음악가는 자신이 이야기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는 노랫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음악가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노랫말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삶으로부터 노래를 건져 올려야 한다. 세상과 삶의 관계를 살피고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정형화된 표현의 금기를 깨야 한다. 과감하고 솔직해야 한다. 좋은 노래를 만드는 일이 이리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