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재구성해 공개한 문자. 문자 내용을 공개한 김규완 CBS논설실장은 김건희 여사가 지난 1월 18~21일 사이 한 전 비대위원장에게 이러한 내용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보냈으나, 한 전 비대위원장이 답장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김건희 문자 ‘읽씹’ 논란이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흔들고 있다.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김건희 여사와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사이에 오간 문자 내용보다 공개 시점과 영향이 정치적으로 훨씬 중요하다.
김규완 CBS 논설실장이 공개한 지난 1월 김 여사가 한 전 위원장에게 보냈다는 텔레그램 문자 요지는 김 여사가 디올백 수수 사과에 대해 한 전 위원장의 의견을 구한다는 것이다. 김 논설실장은 원문을 받았으나 요지를 편집해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문자를 읽은 한 전 위원장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아 이른바 ‘읽씹’ 논란이 불거졌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나선 원희룡 후보를 비롯해 한 전 위원장을 반대하는 진영은 일제히 오판론, 총선패배 책임론, 당 장악 기도론 등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지적도 쏟아진다. 김 여사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장예찬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문자 공개 직후 페이스북에 ‘해당 문자는 사실이’라며 공격을 적극 엄호했다.
파문이 커지지만 김 여사나 대통령실에서는 문자 공개를 비난하거나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김 여사와 한 전 위원장이다. 김 여사로부터 문자가 전달되고 측근이 사실관계를 확인해, 전당대회에 나선 ‘반한동훈’ 세력의 공세를 지휘한 모양새다. 김 여사가 문자 공개를 최소한 용인한 셈이다. 여당 전당대회에 영부인이 한 진영의 플레이어로 등판한 초유의 상황이다.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했던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은 “김 여사의 전당대회 개입”이라며 “지난해 전당대회 개입은 순한맛이었고 이번이 매운맛”이라고 평가했다.
김건희 문자 공개는 전당대회 개입 논란만 부른 것이 아니다. 김 여사가 한 전 위원장에게 해당 문자 외에도 여러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풍문이 파다하다. 물론 이는 최근에 나온 의혹은 아니다. 정부 출범 이후 김 여사가 인사를 비롯해 국정에 개입한다는 의혹은 여러 측면에서 불거졌다. 해외 순방에 민간인을 대동한 사태도 김 여사로부터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디올백 수수를 폭로한 최재영 목사의 핵심 폭로도 김 여사의 인사 개입이었다. 대통령실에 김 여사 인맥이 구축돼 있다는 지적도 여야를 막론하고 꾸준히 제기됐다.
이번 문자 공개는 기존 의혹에 불을 댕겼다. 그런 면에서 국정개입 논란을 불사하고 문자를 공개했다는 점은 상당히 의외이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영부인과 정권 2인자 간의 권력투쟁 폭로정치 등 음모가 횡행한다”며 “국정개입 국정농단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조국 의원도 “박근혜 대통령은 당무 개입으로 윤석열·한동훈에게 기소되어 처벌됐다”면서 “김건희 특검법을 다시 발의하고 통과시켜, 그의 휴대폰을 압수수색하여 실체적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디올백 수수 영상이 공개되고 12월 순방을 끝으로 김 여사가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지난 5월부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 여사는 최근 보란 듯이 과감한 행보를 이어갔다. 사실상 디올백 사태 이전으로 돌아갔다. 최근엔 서울시청 앞 사고현장을 방문했다 ‘우연히’ 포착돼 선명한 사진이 찍히고, ‘경호도 없이 혼자 갔다’는 확인 불가 이야기까지 온라인 커뮤니티에 돌아 뒷말을 남겼다. 문자 공개는 영부인 활동을 복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여당 전당대회에 직접 뛰어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상당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전격 공개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이 고려됐다고 보인다. 하나는 한동훈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배신자론, 정치초보론 등의 공세로 초반보다는 살짝 꺾였으나 아직 한동훈 지지세가 건재하다. 김 여사 측에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가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약속, 공정 경선 서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공동취재) 2024.07.05. ⓒ뉴시스
또 하나는 한 전 위원장이 파국으로 몰고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실제 한 전 위원장 측은 문자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아둔한 자해극”이라고 반박했지만 김 여사를 지목한 비판은 피하고 있다. 문자 원문도 공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김 여사의 문자에 디올백 사과 외에 다른 내용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김 여사와 한 전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 수백 통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공개될 경우 용산과 한 전 위원장은 전면전에 들어가고 국정농단 논란 등 양측 모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 여당 대표와 대선후보를 노리는 한 전 위원장으로서는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은 길일 것이다. 이런 점을 노린 듯 친윤 후보인 원희룡 전 장관은 7일 “문자를 공개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눈에 띄는 점은 친윤 세력이 김건희 문자를 앞세워 총공세에 나섰고, 영부인 국정개입 논란으로 번질 태세인데 대통령실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은 7일에야 관계자가 언론에 “국민의힘 전당대회 선거 과정에서 일절 개입과 간여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상황과 동떨어진 원론적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용산을 패싱하고 김건희, 한동훈 양자가 직접 맞붙은 꼴이다. 이는 현재 상황을 윤 대통령도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자 공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장예찬 전 최고위원은 8일 방송에 출연해 추가 폭로를 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아울러 대통령실의 무대응은 김건희 여사가 ‘노터치’의 존재라는 점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