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뭘 고민하세요? 그냥 죽어요!"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죽이지 못해 끝없이 망설이는 원작 '햄릿'과 달리 국립극단 '햄릿'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향해 몸을 던진다. 135분의 상영 시간 내내 무대를 채우는 시린 물 풍경마저 햄릿의 뜨거움을 삭히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파멸 속으로 사그라지는 햄릿의 모습을 관객은 보게 된다.
2021년 코로나 위기로, 대면 공연이 아닌 온라인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야 했던 국립극단의 '햄릿'이 지난 5일 첫 번째 공연으로 드디어 관객을 만났다. '햄릿'을 만든 창작진 정진새 작가와 부새롬 연출가, 그리고 햄릿을 연기한 이봉련 배우는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햄릿'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 사람은 온라인 공연을 통해서 관객을 만났다가 올해 드디어 대면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 소감을 털어놨다.
정진새 작가는 "사실 우리 햄릿이 관객을 만난 게 그때가 처음이어서 부새롬 연출과 햄릿을 고치면서 '우리 관객의 반응은 어떨 거다' 예상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대본 작업했다"면서 "실제 그것을 경험하게 된 건 금요일(5일) 첫공이었다. 기대한 반응과는 다른 반응을 보기도 했고, 저 자신이 하나의 굉장한 관객이 되어서 입을 벌리고 봤다"고 말했다.
이봉련 배우는 "공연이 시작됐다는 느낌이 기자분들도 만나 뵙게 되고 객석에 관객이 차면서 공연 외에 다른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더 느끼는 듯하다'면서 "그때 이런저런 많은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떤 공연보다, 햄릿 관객이 제게 귀한 관객이다, 그래서 소감을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부새롬 연출가는 "보신 분은 알겠지만, 무대에서 물도 쓰고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며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이런 것 때문에 그랬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첫 공연을 무사히 올려서 지금 딱히 다른 소감은 없고 마지막 공연까지 배우들이 건강하게 다치지 않고 사고 없이 공연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다"면서 "관객분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국립극단 연극 '햄릿'의 한 장면 ⓒ국립극단
국립극단에 따르면 현재 '햄릿'은 전회차 매진됐다. 압도적인 무대, 배우들의 연기,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향연, 주옥같은 대사들, 느릿하게 진행되는 듯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무대 분위기 덕분이다.
부새롬 연출가는 "왜 이 공연에 여성 주인공이 필요했고, 물이 필요했나"라는 질문에 이와 같이 대답했다.
부 연출가는 "처음에 이 작품을 제안받고 진새 작가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원작에서 제가 느끼는 불편한 지점을 어떻게 불편하지 않게 만들까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 지점 중의 하나가 아무래도 '햄릿'이 아주 오래전에 쓰인 작품이니, 여성을 향한 여러 혐오나 폄하적인 것들을 덜어내고 싶었다"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햄릿의 성별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때 영국은 여왕이 있었으니까 여왕이 왕이잖아, 햄릿이 공주일 수도 있겠다' 그런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부 연출가는 무대에 물을 사용한 것에 대해선 "물을 쓴 것은 제가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다"라며 "이 작품 안에 진새 작가님이 설정해 놓은 '유령이 바다에서 나타난다', '해군' 설정 때문에 우리 디자이너가 먼저 물을 써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햄릿' 무대에선 물이 위에서 쏟아지기도 하고, 무대가 하나의 거대한 수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무대는 박상봉 디자이너가 맡았다.
이어 "그 아이디어가 좋아서, 사실 의미를 나중에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물이 죽음의 공간, 죽음으로 이끄는 의미로 해석을 해서 연출을 했다"고 말했다.
이봉련 배우는 '햄릿'으로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햄릿'은 이봉련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선 편견을 발견하게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봉련에게 '햄릿'이 여러 의미로 특별한 작품인 이유다.
이봉련은 "햄릿이라는 역할은 제게 있어서 제가 갖고 있던 편견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며 "'햄릿은 어떠해야 한다', '희곡 안에서 주인공 자리가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나가는 작업에 있어서 저에겐 제 인생에 천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후에 할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봉련 햄릿'이 보여주고자 했던 햄릿은 어떤 햄릿인가"라는 질문에 "저희 햄릿 안에 있는 '이 햄릿'은 '봉련 햄릿'이라기 보다는 다 같이 작업하면서 만든 햄릿이다. 본인이 만든 정의가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고, 본인의 왕권 회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를 찾아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원작 햄릿이 왕권 회복을 덜 드러내고 있어서, 그게 좀 비교가 돼서 관객이 그걸 알 수 있다면, 제가 지금 연기하는 현재의 햄릿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마치 정의를 위해 아버지 죽음을 파헤치는 것 같지만, 나중엔 그것보다 더 큰 것들이 햄릿을 그냥 다 먹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여 말했다.
정진새 작가(왼쪽부터), 이봉련 배우, 부새롬 연출가.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햄릿'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국립극단 제공
부새롬 연출가는 "왜 햄릿 역할에 이봉련이었나"라는 질문엔 "연기를 너무 잘해서"라고 대답했다. 부 연출가는 "외모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 좋은 건 아닌데 체구도 작고 그런 게 좋았다"면서 "맞으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인데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싸우려고 하고 그런 느낌이 나는 배우여서 좋았다"고 설명했다.
'햄릿'의 현대적인 각색은 동시대 관객을 좀 더 우리의 삶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관객은 2024년 '햄릿' 안에서 놀고, 즐기고, 생각하고, 분노할 수 있게 된다. 정진새 작가는 '한국 사회 현실을 촘촘히 덧입혔다'는 국립극단 소개와 관련해 추가적인 질문이 들어오자 이와 같이 답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어떤 것들을 많이 담아냈다고 하는데 민망한 지점이, 햄릿을 각색할 때 우리 한국 모습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야겠다는 인식을 가졌다기 보다는 창작진의 상태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 세월호, 미투 운동,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2년 터울로 '연극은 무엇이어야 하나'를 삭히던 차에 햄릿을 만났을 때 원작이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 여성 혐오를 덜어내고 채울 수 있는 건 우리가 지금까지 연극을 어떻게 했나에 대한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저는 부새롬 연출과 작품 이야기도 했지만, 연극을 하면서 사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기회나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선 동시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동시대적 이야기면서 전 세계적인 풍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7월 2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진행된다.
정진새 작가(왼쪽부터), 이봉련 배우, 부새롬 연출가.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햄릿'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국립극단